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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단상 37. 놀이로 배우는 기술: 바둑 바이브코딩

by 여철기 글쓰기

스트레스 해소에서 시작된 16,000판


인터넷 바둑을 시작한 것은 직장 생활과 사업 초기의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회사에 다닐 때도,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쌓이는 스트레스를 혼자 풀 방법이 필요했다.
술자리도, 운동도 좋았지만 나는 집에서 조용히 혼자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원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인터넷 바둑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특별한 목표도 없었고, 그저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마다 한 판씩 두는 게 전부였다.
힘든 하루를 마친 저녁, 복잡한 제안서를 끝낸 뒤, 혹은 고객 미팅을 마치고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기보를 보며 공부하지도, 정석을 외우지도 않았다.
그저 두고 싶을 때 두었고, 지면 잠시 아쉬워하다가 다음 판을 기다렸다.


신기하게도, 단순한 놀이로 시작한 바둑이 어느새 실력 향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16,000판이 쌓였을 때, 나는 인터넷 6단이 되어 있었다.
체계적인 공부도, 스승도 없이, 오로지 ‘실전’만으로 쌓은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 위로는 쉽지 않았다.
6단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바둑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기기 위해 공부해야 하고, 정석을 외워야 하고, 복기를 해야 했다.
그때 깨달았다.
즐겁지 않다면 더 잘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 경험은 내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교재 하나 보지 않아도, 체계적인 학습이 없어도,
충분히 많이 가지고 놀면 실력은 저절로 오른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즐거움’이 가장 강력한 지속력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바이브 코딩이라는 놀이터


요즘 나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코딩, 이른바 ‘바이브 코딩’을 한다.
놀랍게도 이건 바둑과 매우 닮아 있다.
얼마나 자주 AI와 대화하며 코드를 만지고, 수정하고, 실험해보는가에 따라 실력이 달라진다.


나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문법을 외우지 않는다.
알고리즘 책을 정독하지도 않는다.
만들고 싶은 것이 생기면 AI에게 물어보고, 함께 코드를 짠다.
에러가 나면 왜 그런지 물어보고, 다시 시도한다.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기능이 완성되어 있다.
바둑을 두며 “아, 이렇게 두면 이렇게 되는구나”를 몸으로 익혔듯,
코딩에서도 “아, 이렇게 하면 이렇게 작동하는구나”를 체득해간다.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 엔진 구조를 알 필요는 없다.
운전만 익히면 된다.
바이브 코딩도 그렇다.
모든 원리를 깊이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AI가 그 간극을 메워준다.


공부가 아닌 놀이로


많은 사람들이 코딩을 ‘공부’나 ‘일’로 여긴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고, 시작도 하기 전에 지쳐버린다.
하지만 나는 코딩을 ‘놀이’로 생각한다.
게임하듯, 바둑 두듯, 하고 싶을 때 하고, 만들고 싶을 때 만든다.

업무에 필요한 도구들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기능이 있으면 재미있겠다’,
‘이렇게 개선하면 더 편하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술이 쌓였다.


돌이켜보면 바둑도, 바이브 코딩도 시작은 같았다.
바둑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코딩은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둘 다 거창한 목표가 아닌, ‘필요해서 시작한 작은 시도’였다.
그런데 그 가벼운 시작이 내 삶을 바꿨다.


언젠가 놀이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지금은 그저 이 여정이 즐겁다.


바둑 16,000판이 나를 6단으로 만들었듯,
앞으로의 수많은 ‘코딩 놀이’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다.
때로는 진지한 공부보다, 가벼운 놀이가 더 멀리 데려다준다.
적어도 내 경험은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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