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 28. 정부 R&D 발표, 12장이면 충분합니다

by 여철기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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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제미나이, 나노바나나


정부 과제 발표를 준비하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연구개발계획서를 거의 그대로 슬라이드로 옮겨 놓은 발표입니다. 기업 소개로 시작해 기술 설명을 하고, 시장 분석을 거쳐 팀 구성과 사업화 전략으로 마무리합니다. 틀린 방식은 아닙니다. 익숙하고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심사위원은 발표를 항목별로 듣지 않습니다. 발표를 들으며 계속 한 가지 질문을 반복합니다. "이게 왜 안 될까?" 시장이 과연 있는지, 기술이 정말 작동하는지, 이 팀이 끝까지 해낼 수 있는지. 이 질문이 해소되지 않으면 점수는 올라가지 않습니다.


발표는 성과를 나열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실패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 나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발표 구조를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씀드립니다. 연구개발계획서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는 대신, 심사위원의 의심이 움직이는 순서에 맞춰 재배열하는 것입니다. 15분 기준이라면 12장이면 됩니다.

먼저 문제를 보여줍니다. 이 문제가 정말 존재하는지, 얼마나 심각한지를 숫자로 확인시킵니다. 막연한 전망이 아니라 구체적인 규모와 손실, 빈도 같은 지표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의 실재성이 납득되어야 다음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됩니다.


그다음에는 기존 방식의 한계를 짚습니다. 이미 시장에 해결책이 있다면, 왜 그것으로는 부족한지를 먼저 보여줘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시장에 대한 의심을 줄이는 과정입니다.

그 위에 기술을 올립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설명의 양이 아니라 개선의 크기입니다.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가능하다면 Before-After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기술이 작동한다는 근거가 눈에 보이면, "되긴 하는 건가?"라는 의심은 상당 부분 사라집니다.


이어서 시장의 실제 반응을 보여줍니다. 고객이 돈을 냈는지, 초기 매출이나 계약이 있는지, 수익 구조는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지. 기술의 가능성과 사업의 지속 가능성은 서로 다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우리여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구조적 이유, 그리고 이를 실행할 팀의 역량을 보여주는데, 이때 경력보다는 성과가 말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리스크를 다룹니다. 모든 과제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숨기는 게 아니라, 인지하고 있고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한 장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여기에 정책적 가치와 기대효과를 붙이면 전체 구조가 마무리됩니다.

정리하면 순서는 단순합니다. 문제, 한계, 해결, 검증, 지속성, 실행, 리스크, 그리고 정리. 표지부터 핵심 요약까지 합쳐 12장이면 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앞에서 해소된 의심은 뒤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충분히 입증되면 시장을 다시 묻지 않고, 기술이 수치로 증명되면 작동 여부를 다시 묻지 않습니다. 의심이 단계적으로 줄어들면서, 마지막 장표에 도달했을 때 공격할 지점이 거의 남지 않게 됩니다.

연구개발계획서는 양식이 정해져 있으니 그 순서대로 쓰면 됩니다. 하지만 발표는 다릅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순서로 말하느냐에 따라 설득력은 달라집니다. 서면은 항목별 채점의 도구이고, 발표는 제한된 시간 안에 확신을 만드는 도구입니다. 목적이 다르면 구조도 달라야 합니다.


떨어진 발표를 복기해 보면, 내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배치가 어긋나 있었던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좋은 데이터가 엉뚱한 자리에 묻혀 있거나, 심사위원이 의심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발표의 수준은 문장의 화려함이 아니라 배열의 정확성에서 결정됩니다. 12장 구조는 특별한 비법이 아닙니다. 의심의 순서를 따라가 보자는 제안입니다. 내용을 바꾸지 않아도, 순서를 정리하는 것만으로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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