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생활
비밀 일기 4.
열 살? 학교에서 단체 영화관람이 있었다. 관람료는 7원. 오빠는 벌써 돈을 들고 학교로 달려갔는데 나는? 가지 말라고 했다. ‘돈 없다.’ 딱 잘라 말하는 엄마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나도 보내 달라고 징징거렸다. 눈길조차 없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도 갈 거야. 반복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무슨 일로 들렀는지, 외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애태우지 말고 그만 가게 하라고. 그 덕분에 받은 10원. 동네 구멍가게로 덜려가 잔돈으로 바꾸었다. 3원을 엄마에게 가져다주고. 7원을 들고 숨이 차도록 달렸다. 아직 출발 전이었고. 모두 줄을 서 있었다. 겨우 내 자리를 찾아 숨을 모으고 있을 때, 오빠가 곁에 와서 물었다. 얼마 받았어? 7원. 나는 10원 받았는데. 오빠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순간 구멍가게에서 바꾼 잔돈을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아. 영화관람은 할 수 있으니까.
3원이 남으니까 바가지 과자 열다섯 개네. 라고 말해 주었다. 너 혼자 많이 먹어. 난, 바가지 과자 안 좋아해. 말하고 바로 후회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을. 어쩌면 이 말, 바가지 과자 열다섯 개라는 것이 영화관람비 7원을 오래도록 기억나게 하는 것 같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영화는 실화라고 했다. 실화거나 말거나 내용이 어떠하건 내겐 상관도 없었다. 그냥, 처음 본 영화라는 것. 엄마를 조르고 졸라서 내가 영화를 봤다는 게 중요했다. 무지하게 가난한 사람들. 딱 두 장면만 기억한다. 어린 아기를 줄로 묶어서 나무에 매어두고 소금밭을 오가던 아줌마의 모습과 옷가지를 태우느라 막대기를 들고 서서. 우리 엄마 죽었어. 라며 웃던 꼬마.
남산동에 있는 문화 성냥 공장의 넓은 공간을 기억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저만치 안쪽에서부터 반겨주던, 커다란 목소리의 아저씨. 엄마를 따라왔구나. 너도 한 보따리 줄게. 집에서 엄마가 손에 쥐어준 보자기에 한가득, 아저씨는 웃으면서 담아주었다. 김천 극장 앞으로, 남산동 골짜기로 다니던 성냥팔이. 낱개 성냥개비를 한 홉, 두 홉 되어 팔던 성냥 장사는 몇 번 가지 않아 곽 성냥이 나오면서 끝났다. 영화관람비 7원과. 성냥 공장의 아저씨가 싸 준 성냥 한 보자기는 늘 함께 나타나곤 했다. 영화관람보다는 성냥팔이가 훨씬 먼저 일어난 일이었는데. 왜 함께하는 기억인지? 모르겠다. 아주 오랫동안. 7원의 기억은 고마움보다 징징대던 내 모습으로 크게 남았다. 그 이후로는 두 번을 말하지 않았다. 눈치껏 해야 할 일을 찾았고. 준비물은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나갔다. 덕분에 학교생활은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거지와도 같은 학교가 나았다.
학교에서 회충약을 먹는 날이 되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선생님께 부탁했다. 아버지가 회충약, 남는 게 있으면 좀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다행히 어느 선생님도 별다른 말이 없이 회충약을 챙겨주었다. 학교에서 우유 급식을 주는 날에 아버지는 군용 물통을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남는 게 있으면 조금, 담아 오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뚜껑이 달린 스테인리스 군용 수통은 우유 급식 날의 준비물이 되곤 했다. 옥수수빵은 남는 게 없어서였는지, 아버지가 안 챙겼는지. 덤으로 받은 기억은 없다.
공부는, 어렵지 않았다. 5 학년부터는 1년은 묵은 오빠의 ‘동아 전과’를 챙길 수 있어 더 쉬웠다. 물론, 한 번도 칭찬받은 적은 없다. 오히려 질문에 답을 하면 문제가 되었다. 어느 틈에 옆 친구 것을 훔쳐보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럴밖에. 거지였잖아. 게다가 5학년 봄에 복숭아 사건도 있었던 터라 최악의 학교생활이었지만
어쨌거나 잘, 아주, 잘 버티고 여기까지 왔다. 때때로, 나는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혼자만의 세상에서 가끔, 먼 나라 친구에게 동의를 구하며. 202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