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모레가 방학이지만 신정 덕분에 모처럼의 휴일을 눈부신 햇살과 함께 즐기고 있다. 주말이면 남편과 함께 구이 저수지 둘레길 운동을 나갔기 때문에 오늘도 휴일이어서 당연히 구이 둘레길에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보, 오늘 구이 둘레길 운동하고 중인동에 가서 오랫만에 팥죽 먹고 오면 어떨까? 동짓죽도 먹지 않았는데......" "오늘 스크린 약속이 있는데... 어제 재미있게들 치고 나서 오늘도 치자고 약속들을 했거든. 당신 방학하면 먹으러 가자."
"잘 했네. 팥죽이야 언제든 먹으면 되니까."
내가 팥죽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는 남편이 살짝 미안한 듯 방학하면 가자고 한다. 일요일에도 영업을 하면 생각날 때마다 요일 구애받지 않고 가서 먹었을 텐데 언제부터인가 일요일은 '영업 휴일'이 되어서 아쉬웠었다. 우리 엄마가 해주셨던 진한 팥죽을 맛볼 수 있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팥죽집이었기 때문이다.
방학 때마다 큰 다라이에 가득 팥죽과 큰 나무 소쿠리에 통통한 팥알이 잔뜩 들어간 찰밥을 마루에 놓고 언제든 갖다가 실컷 먹으라고 해주셨었다. 일주일동안 실컷 먹었음에도 남은 팥죽과 찰밥은 챙겨주신 덕분에 집에 올라와서도 한동안 맛있게 먹으며 우리 엄마의 정성과 사랑을 느끼곤 했었는데...... 그새 중년이 되어버린 우리 아이들도 외할머니 생각하면 단연코 팥죽과 찰밥이란다.
중인동 팥죽
이젠 내 차례가 되어서 우리 외손주들에게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특별음식으로 무엇을 만들어 줄까 고민하기도 전에 이구동성으로 미역국이란다. 어디에 가서 먹어봐도 외할머니가 끓여준 미역국이 최고라며 4시간 가까이 걸려서 내려오는 동안에도 미역국 먹을 생각을 하면 즐겁다나.
우리 첫사랑 지우가 학원을 마치고 늦은 시각에 송도에서 출발, 4시간여 내려오면서 지쳐 그대로 다들 쓰러질 법도 한데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자마자 미역국 타령이다.
"할머니, 미역국 먹고 싶어!"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며 큰 냄비에 좋아하는 미역과 한우를 넣어서 가득 끓여 놓았으니 미역국을 찾는 우리 아이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삼둥이는 물론 사위까지 미역을 듬뿍 넣어서 담아주었는데 맛있게 먹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엄마가 이런 기쁨으로 그 힘든 것들을 해주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둥이들이 올라가고 난 뒤 남은 미역국
"와, 오랫만에 집에 있으니 햇살이 너무 좋다. 나는 이렇게 햇살이 좋은 날 너무 행복해!"
"그래. 당신처럼 이렇게 작은 것에도 행복할 줄 알아야 진정 행복한 거야. 작은 것에 행복할 줄 모르면 큰 것을 갖다 주어도 행복할 줄 모르거든."
와이프와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 나가게 된 남편이 미안해 할까봐 오늘 하루종일 혼자 집에 있어도 행복 가득이니 와이프는 염려말고 즐겁게 치고 오라고 한 말인데 남편은 진심어린 말을 남기고 나간다. 얼마 전 남편이 속해 있는 교회 소그룹 모임의 회원 분이 소그룹에서 남편이 했던 말을 전해주어서 남편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함께 산다고 해도 말을 하지 않으면 속속들이 생각은 당연히 모른다.
"우리 와이프는 작은 일에도 그렇게 행복해 하는데 나는 행복한 줄 모르니 큰 것에도 행복을 못 느낀다. 그래서 매사가 힘들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도 우리 와이프처럼 작은 일에서부터 행복을 느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력하고 있다."
출처 픽사베이
구이에 땅을 구입하고 집을 짓겠다는 동생(남편)의 말에 김포에서 두 아드님과 전원주택을 짓고 계시는 둘째 시숙님께서 김포에 많은 전원주택이 있으니 어떤 모양의 집을 지을 것인지 결정을 하라며 부르셨다. 남편과 함께 여러 집의 모양을 둘러보면서 시숙님께서 추천하신 집이 있었단다.
"제수씨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예술가이니 살짝 기울어져 있는 저 빨간 집이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떠냐?"
라는 시숙님의 말씀에 집사람과 상의를 해보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사진을 찍어왔다며 보여주었었다.
며칠 뒤 집을 지으려면 땅을 일단 봐야 한다시며 형님 내외분과 함께 남편이 다녀왔다. 수지까지 오셔서 남편의 차로 움직였다며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나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잠깐 올라오셨단다.
"제수씨, 내가 동생에게 말했지만 빨강 색의 살짝 기울어진 집 모양 어때요?" 하고 물으신다.
남편에게 시숙님의 말씀을 이미 전해듣고 집의 모양을 사진으로도 봤지만 기울어진 그리고 빨강 집은 내 정서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숙님, 저는 집의 모양보다 정남향으로 햇볕이 많이 들어오는 통창만 있으면 돼요. 판넬로 지어도 좋으니 모양이 단순하고 깔끔한 정사각형의 집이 좋아요." 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시숙님께서 알아들으셨다는 듯
"그럼, 내부 설계도는 제수씨가 원하는 구조로 그려봐요."하셨다. 집을 나서기 전 형님은
"동서, 땅을 잘 샀더라. 위치도 좋고 땅 모양이 아주 좋아. 집을 지어놓으면 전망이 좋을 거 같아. 축하해!"라는 말씀을 남기고 늦은 시간 두 분이 김포로 출발하셨다.
동생이 집을 짓는다니 내 집을 짓는 것처럼 먼 길도 마다않고 하룻만에 다녀오시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고 꼼꼼이 챙겨주시는 시숙님과 형님이 너무나 감사했다.
집 모양이 예쁜 것보다 햇볕이 많이 들어오는 집을 고집하는 것에는 남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결혼 전 우리 집은 대낮에도 전깃불을 켜야 하는 어둡고 습한 옛날집 한옥으로 밖에서는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한밤중마냥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늘 안타까웠고 어른이 되어서 돈을 벌게 되면 햇볕이 많이 들어오는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아버지의 거동이 불편하시고 급기야는 몸져 눕게되자 우리 아버지를 위한 따뜻하고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파트를 마련해 드리고 싶어서 내심 안달이 났었다. 부부교사라고 해야 늘 넉넉치 못한 형편이었기에 말도 안 되는 욕심에 혹여라도 당첨될까 남몰래 복권을 구입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결국 아버지를 향한 간절한 내 소망이었을 뿐 그 어두운 집에서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셨다.
오매불망 맏딸을 기다리는 엄마를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퇴임하고 내려오고 싶었으나
"엄마, 정년하면 바로 내려올게. 건강 잘 지키면서 조금만 기다려요. 내려와서 엄마와 함께 살 거니까... 약속할 수 있지?"
"그럼~~~"
손가락 걸어 약속을 했지만 우리 엄마는 이미 중증의 치매로
"옥님아, 언제 내려오냐?"라며 방학 즈음이면 잊지도 않으시고 물어보시던 엄마의 전화가 끊긴 지 이미 오래이고 그렇게도 기다렸던 맏딸에게는 "언니!"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당신의 막내 아들에게는 "오빠!"라고 부르셨던 미어지는 아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엄마를 생각하며 이상하게 마음이 급해지고 불안하던 차에 건강 문제로 더 늦기 전에 건강도 챙기면서 후회하지 않게 우리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서둘러 과감히 명퇴를 하고 내려왔다.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넓은 통창으로 하루종일 햇볕이 들어오는 넉넉한 공간의 집을 지었지만 내려온 지 6개월 만에 울 엄마마저 훌쩍 떠나버리셨다.
시숙님의 정성이 깃든 하루종이 햇살 가득한 집
삼둥이들의 천국
그나마 감사한 것은 우리 집 나무에서 나온 홍시를 요양원에 누워계시는 엄마에게 갖다드리면
"맛나다~~ 맛나다~~"라는 말을 연이어 하며 정말 맛있게 받아드셨던 엄마의 모습에 그나마 위안과 위로를 얻는다.
부모님을 위한 햇살 좋은 집은 안되었지만 울 삼둥이들의 천국이 되어서 너무나 감사하다. 코로나 시절 외국에서 살다 들어온 우리 삼둥이들에게 우리집은 천국이었고 2번의 격리기간을 행복하게 보냈었다. 집 안팎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며 소리 높여 깔깔댄들 누구 하나 테크를 거는 사람이 없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