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화
"여보, 이 등산화 요물이네."
몇 번 눈길에 미끄러지고 나서 두려움과 노이로제에 걸린 나를 위해 남편이 구입해 준 등산화를 신고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구이 둘레길 운동을 나섰다. 며칠 전 내린 폭설로 곳곳에 쌓인 눈과 군데군데 얼어붙은 길이 예전 트래킹화였다면 언제 또 여지없이 쓰리쿠션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미끄러진 경험이 여러 번 있다 보니 새 등산화를 신고도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조심 소심하게 눈길을 들어섰으나 신기하게도 눈이 등산화 바닥에 쩍쩍 들어붙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예전 등산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혹시 또 언제 미끄러질지 모르는 일이니 대비 차원에서 부러 미끄럼을 시도했으나 브레이크 걸리듯 턱 걸리는 것이 마음 놓고 걸어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눈길 위를 당당하고 자신 있게 걸어가자 남편이 불안했던 듯 질퍽한 진흙이나 녹은 눈길이 나오면
"이런 곳에서는 조심해야 해. 눈과 달라서 밟기만 하면 미끄러지는 곳이야."하고 주의를 준다. 그리고 남편은 하얀 눈이 쌓인 곳에서 발자국을 찍어보라 한다.
"옆에 찍힌 발자국과 비교해 봐. 등산화 바닥이 이렇게 뚜렷하게 모양이 나타나야 미끄럽지 않아. 눈을 사방으로 잡아주잖아. 예전에 신었던 등산화의 바닥은 닳아져서 옆 자국처럼 약해서 미끄러웠던 거지. 자동차 타이어와 같은 원리야."라며 확장시켜서 등산화 바닥을 자동차 타이어와 비교해 한참 설명을 해주는데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남편을 뒤따라가며 등산화를 구입한 온라인 쇼핑몰이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이 쇼핑몰로 인해서 타 쇼핑몰들이 타격을 입고 있다는 내용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남편의 쇼핑을 통해서 느꼈기 때문이다.
이 쇼핑몰의 사업 수완이 타사 쇼핑몰과 확연히 달랐던 점은 반품과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에 대한 반응이었다. 사진으로만 보고 주문한 물건이기 때문에 100% 만족시킬 수 없다는 고객들의 마음을 감안하고 배려해서 반품 의사를 보내면 상품에 따라 환불해 주고 무료로 쓰라는 문자를 주거나 VIP고객이라는 이유로 한 번씩 1원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도 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추가해서 구입할 계획으로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아두는 기간이 길어지면 할인해 준다는 문자가 와서 구입을 유도한다니 그래서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을 구입할 수 밖에 없다며 사업 수완이 탁월하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 나도 공감을 했다.
고객을 배려하고 헤아릴 뿐 아니라 구매 의욕을 높이는 사업 수완으로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니 인터넷 쇼핑을 전혀 하지 않았던 남편이 왜 이 쇼핑몰을 애용하고 있는지 이해가 갔다. 박리다매로 저렴한 가격의 쇼핑몰이지만 실망시키는 물건보다 만족시켜 주는 물건이 더 많다 보니 쇼핑 중독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치 다이소 초기의 신세계처럼.....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된 이 쇼핑몰에서 남편은 작년 하반기부터 신발을 비롯 농업 기구용 부품 등 일상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을 사들이고 있어 은근 염려를 했으나 어느 정도 충족이 되었는지 이제는 다행히 뜸하다.
신기한 요물, 이 등산화도 남편이 애용하는 쇼핑몰에서 구입 후 며칠 전에 도착을 했다. 사이즈를 물어보더니 모양, 색상도 묻지 않고 남편이 알아서 주문을 했다. 막상 도착한 등산화를 보고 겨울이라고 털이 발목까지 올라온 모습을 보고 살짝 실망을 했다.
"여보, 털이 없어야 전천후로 신을 텐데......"말해놓고 나니 남편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곧바로
"색상은 자주색으로 내가 좋아하는 색이네. 겨울에도 계속 운동을 해야 하니까 따뜻하게 잘 신을 것 같아"
"내가 다 알아서 구입한 거야. 색상도 이 색이 제일 낫더라구. 그리고 굳이 두터운 양말을 안 신어도 좋도록 털이 달린 것으로 일부러 구입했지."
"당신의 깊은 속을 미처 몰랐어. 잘 신을게. 여보!"
돌아오는 둘레길에서 문득 친정에 내려오면 현관에 예쁘게 놓여있던 우리 엄마 등산화가 생각났다. 목까지 올라온 진 베이지색의 작은 등산화를 아버지가 사다 주셨다며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셨단다. 아버지도 움직일 수 있는 한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주어야 한다며 지팡이를 짚고 운동을 다니셨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엄마의 등산화는 묵묵히 현관만 지키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한동안 현관에 그대로 놓여있던 등산화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내 발에 맞았다면 엄마를 생각하며 챙겨서 신었을 텐데.....
10여년 전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해외여행을 처음으로 가게 된 이탈리아 3국을 앞두고 마련했던 모 브랜드의 트래킹화를 부부 함께 구입했었다. 이후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신었으니 특히 내 것은 마르고 닳아서 너덜거리는 곳들을 본드로 붙이고 꿰매어 신었다. 그런데 한계에 달했는지 본드로도 해결이 안 되고 꿰맬 수도 없으니 오랜 정이 들어서 버리지 못하는 트래킹화를 브랜드사에 수선 여부 전화라도 해서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누군가 밑져야 본전이라고 시도해서 안 된다면 그만인 것이다.
남편이 사 준 등산화가 솔직히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가격에 상관없이 아내를 생각하며 골랐을 남편의 마음이 고맙고 남편이 사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신고 있다. 볼수록 예쁘고 신을수록 괜찮다. 살짝 아쉬운 점은 전천후가 아닌 겨울에만 신을 수 있으니 따뜻해지면 다른 트래킹화를 알아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