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좋은 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 글쓰기와 산책.

by 소미소리

글쓰기가 내게 가져다 준 것은 매일의 산책이 내게 가져다 준 것과 동일하다. 바다 건너의 흰 나비의 날갯짓 서너 번이 태풍을 가져오고 날씨를 바꾸었다는 것을 나는 내 삶으로 이해한다. 10여 년 전, 나이든 방황기(彷徨期)를 보내던 때에, 뭘 해도 재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가장 재미난 것을 독서에서 발견했다. 이렇게 무궁무진한 재미가 속속들이 숨겨져 있는, 깨알 같은 재미를 다 찾지도 못할 만큼, 마치 커다란 케이크가 내 앞에 있고, 나는 그것을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더라도 즐거운 것처럼, 책을 한 권 내 앞에 둘 때의 느낌이 그러했다. 다독을 하지 않아도 그저 한 권, 한 권의 책을 읽을 때의 즐거움을 누리며 읽었다.


Photo by Alexandra Gornago on Unsplash

그 즈음 산책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과 종일 집에 머물다가, 심지어 음식물 쓰레기라도 버리러 잠깐 나가는 시간에 숨통이 트였다. 미혼일 때도 여기저기 잘 다녔는데, 아무 제약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때에는 그 시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도 못했다. 집에서만 머물며 육아에 전념하던 그 때에, 바깥 바람의 신선함은 그 전의 바깥 바람과는 다른 것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서 만난 시원한 살랑바람과 눈부신 햇살로 시작한 산책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매일 산으로, 자락길과 둘레길로 나가서 바람과 햇볕을 마주한다. 비가 온 날과, 비가 온 다음날, 며칠째 가물은 날, 아침과 저녁으로 산의 모습은 바뀌어 있다. 어떤 날은 산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마음 가득 담아 오고, 어떤 날은 내 생각에 매몰되어, 걷는 내내 초록만 인식할 뿐, 나무나 새와 다람쥐와 작은 풀꽃과 들풀의 흔들림을 스쳐 지나가며 내 문제를 궁리한다. 그리고 신선한 바람이 식혀주는 땀, 그 바람의 시원함이 답을 시원스레 제시해 주는 날도 있다. 아무리 궁리해도 나오지 않던 답, 꽉 막힌 막다른 길에 와 있던 때에, 길이 열리고 전에 알던 어떤 것이 갑자기 떠오르는 날이 있다. 산책이 덤으로 주는 선물이다.


산책을 시작하고, 책을 읽으니 쓰고 싶어졌다. 그러다 모닝페이퍼를 만났고, 모닝페이퍼도 내게 선물을 준다.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생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있게 시간을 두고 고민할 수 있게 했고,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을 마음 가는 대로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나를 알고 싶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본연의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혼자 여행을 가면 알 수 있을까? 나 자신의 욕망을...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정말 나의 바람을 알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답이 쉽게 톡 튀어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난 긴 여행을 시작했다. 나와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보는 여행을.... 매일 글을 썼다. 아무 말이나 아무 생각이나 마구 적었다. 누군가에게 보여 줄 글도 아니고, 나도 다시 읽어 볼 글도 아니니 그냥 떠오르는 대로 빠르게 적었다. 그렇게 세 페이지의 글을 끄적거리고 나면, 내 깊은 내면에서 작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했다.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모르던 나의 모습과 조우했다. 꽁꽁 숨겨둔, 내게 외면 받던 나의 초라한 모습이 하나씩 끄집어내졌다. 그 부끄럽고 형편없는 모습이 드러나고 빛이 쪼여지니, 그것이 나라고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여름에는 이어오던 학업에 수료라는 방점을 찍게 된다. 앞으로도 공부하고 글 쓰고 내가 먼저 알게 된 것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일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일일 것이다.


루빈의 컵(출처: naver 지식백과, 상담학 사전)

루빈의 컵(어떻게 보면 컵으로 보이고, 다르게 보면 두 사람이 마주보는 옆모습 그림)처럼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좋아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 이전의 삶만 못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더 어울리니 그것으로 족하다. 음쓰(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나간 길에 만나 햇볕과 바람, 책과의 만남, 모닝페이퍼를 먼저 쓰던 이웃과의 만남과, 두 번의 100일 글쓰기를 통해 만난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보내며, 오늘의 글쓰기와 산책,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주 좋은 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잠깐의 햇살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한 권의 책이 서 너 번의 날갯짓처럼 내 삶을 나와 더 어울리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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