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자리를 찾아가는 축제
드디어 장롱을 열었다. 곤도 마리에의 <정리의 힘>에서 정리법을 배우고 나니 정리에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주로 쓰는 공간, 내 책상을 정리했고, 아이들이 빈번히 필요한 것을 꺼내는 문구 서랍을 하나 정리했지만, 정리의 축제를 벌이지는 못했다. 손이 가는대로 정리는 했지만 날 잡아 정리를 하지는 못했다는 소리다. 오늘, 특별한 일정이 없다. 아침에 산책을 하자마자 장롱을 열었다. 옷가지들이 빼곡하게 걸려있다.
방 정리는 후딱 끝내는 것이 좋다. 정리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 정리는 매일 해야만 하는 것, 평생 해야 하는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리는 한 번에, 단기간에, 완벽하게 끝낼 수 있다. 평생 해야 하는 것은 ‘버릴지, 남길지의 판단’과 ‘남기기로 정한 물건을 소중히 사용하는 것’이다.(p.244)
곤도 마리에, 2020, 정리의 힘, 경기: 웅진지식하우스
곤도 마리에에 의하면 모든 옷을 다 끄집어내서 한 곳에 모아두고 한 벌씩 만져보며 마음이 설레는지 아닌지를 느끼며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결정해야 한다. 일단 장롱 한 채에서 내 옷만 꺼냈다. 이것만 해도 많다. 다른 장롱의 것까지 꺼냈다가는 압사당할 것만 같다. 일단. 장롱 한 짝의 옷만 꺼내고 한 벌씩 만지며 결정했다. 버릴지 남길지. 예상 외로 되게 쉬웠다. 그간 옷을 별로 사지도(솔직히 사기는 샀다) 버리지도 않았기에 옷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쉬웠다. 가져다 둔 커다란 봉지로 바로바로 넣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감으로 더 이상 입지 않을 옷들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소중한 옷, 애정이 가는 옷은 잠깐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남길 옷으로 분류했다. 일부 옷들은 고민이 되었다. ‘남기면 입을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꽤 잘 어울릴만한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옷을 꼼꼼히 봤다. ‘어디 흠집이라도 발견되면 버려하지.’라는 생각이 올라오는 순간 버렸다. 그래도 버리기 아까운 옷, 아직 예쁜 옷들은 한쪽에 따로 두었다.
곤도 마리에는 옷 정리를 한답시고 동생에게 옷을 물려주는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받는 사람이 입지 않을 옷이라면 줄 필요가 없다고... 스타일을 볼 때, 받는 상대가 잘 입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옷만 나누어 주라고 했다. 버리지도, 남기지도 않을 옷을 봤다. 상태가 아주 좋은(한 번도 입지 않은 옷도 있었다.) 몇 번 입지 않은 옷 중에, 혹은 브랜드가치가 있는 옷은 세 꾸러미로 나누었다. 작아진 옷은 날씬한 이웃에게, 품이 너무 낙낙해서 안 입던 옷은 체격이 있는 이웃에게, 그리고 원피스는 나보다 어린 이웃에게 주려고 잘 개켜서 봉투마다 담아 뒀다. 세탁하고 건조해서 나눔을 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세탁할 정도의 옷은 그냥 버릴 옷으로 분류하고, 깨끗한 옷만 정돈하여 봉투에 담았다. 이 옷들을 이웃들이 다 잘 입지는 않겠지만, 몇 벌만이라도 주인을 제대로 찾으면 좋겠다.
버릴 옷이 큰 비닐봉지를 채우고 작은 비닐봉지까지 가득 채웠다. 옷이 가득 든 봉지를 한쪽에 놓아두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 옷들을 버리고 나야 청소가 마무리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봉지를 겨우 들어가지고 의류함으로 나갔다. 옷을 쓸어서 의류함에 넣는데, ‘잘 골라냈구나, 그동안 이 옷들을 잘 입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 두 벌은 아니었다. 결혼 예복으로 입었던 주황색과 분홍색의 중간쯤 되는 원피스와 내가 엄청 아끼던 화이트와 블랙으로 된 원피스는 의류함에 던져 넣으면서도 아쉽고, 다 버리고 돌아서면서도 아까웠다. ‘기념물로라도 남길걸. 그래도 예복인데... 아파트 관리원(이제 경비원이라고 안하고 관리원이라고 한다)에게 의류함을 다시 열어달라고 해 볼까?’ 순간 몇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버리기로 결정한 것은 버리자고... 의미 있는 물건은 어쩌면 모든 물건이고, 버리지 않을 이유를 대면 버릴 옷은 단 한 벌도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다. 우리는 이처럼 물건 하나하나와 마주해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거쳐 현재에 존재하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p.152)
곤도 마리에, 2020, 정리의 힘, 경기: 웅진지식하우스
버릴 옷을 추리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바쁘기도 많이 바빴지만, 이렇게 방치된 채 입지도 버리지도 않은 옷들이 내 마음의 정리되지 않은 부분, 내 모습 중에 드러내지 않은 채 감추어진 부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남기기로 한 옷을 세탁기에 울세탁 버전으로 약하게 돌렸다. 다 된 빨래를 다시 울세탁 버전으로 건조시키고 마저 말리기 위해서 건조대에 걸었다. 주로 아끼는 옷을 울세탁 코스로 돌리는데, 울세탁으로 손이 가는 것을 보니, 내가 잘 선택한 모양이다. 옷을 몇 벌은 되찾은 느낌이다. 옷장 옷걸이에 답답할 정도로 빽빽하게 걸려 있어서, 보이지도 않던 옷들이 이렇게 잘 있어주었다니 반가웠다. 당장이라도 입을만한 옷들이다. 사실, 나는 옷을 다양하게 입지는 않는다. 한 벌만 가지고 입어도 별로 불편함을 못 느낄만한 사람이다. 그래서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몇 벌 사두고 입는 편이다. 그렇지만 여행을 가거나 어딘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입을 옷을 한 벌도 안 남기는 건 좀.... 옷을 의류함에 넣을 때에는, 그 중 두 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는데, 남긴 옷들을 보니, 이걸로 충분하다. 아직 서랍에 있는 옷들은 정리를 시작하지도 못했다. 서랍까지 한 번에 정리하기에는 체력이 안 된다. 정리도 하루에 할 것은 아니다. 내 옷만 해도 두 번은 나누어 할 판이다. 곤도 마리에게 정리 개인레슨을 받으면 몇 개월씩은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해가 된다. 수십 년간 쌓아온 짐을 정리하는 것은 몇 달이 걸려도 오래 걸린 것이라 할 수 없다. 다음 번, 일정이 없고 컨디션이 좋은 날은 서랍을 열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