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하루

지극한 만족과 극도의 불만 사이

by 소미소리

아주 아주 만족스러운 하루가 흘러가는 도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만과 불안감, 실망과 조그만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럴 필요 없는데… 당장이라도 뜨거운 우유를 한 잔 준비하고 믹스 커피 한 봉을 풀어 넣어 진한 우유 맛이 느껴지는 달콤한 커피 한 잔을 만들고, 아이폰에 저장된 음악 중 가장 달콤한 곡을 플레이하고, 초록색 인조가죽을 입힌 다이어리와 플라스틱 펜을 한 자루 꺼내어 내 마음을 설설 풀어내면 될 것을…. 찰나의 시간과 마음을 내지 못하여, 화창한 시간에 마음 속에서 일어난 싸움을 바라보았다.




아들을 새로운 학원에 데려다 주고 나오는 길이었다. 명확하지 않은 갑갑함과 조그만 분노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앉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닐 만한 학원, 특색 없는 학원, 우리나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학원이다. 그러니 내 아이도 다닐 수 있는 학원이다. 그런데 내 마음 속의 한 부분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느라 노량진 학원에 다닐 때가 떠올랐다. 다닥다닥 붙은 수많은 책상과 의자. 빼곡히 놓인 작은 의자 중에 하나를 겨우 차지하고 숨막히도록 빠르게 나가는 진도를 따라가야만 살아 남았다. 숨막히며 헐떡헐떡 진도를 따라가서는 승리를 차지한다는 보장이 없다. 보고 또 보고, 이미 숙지한 내용을 짚어가며 여유 있게 따라가야 승리가 내 손에 놓인다. 합격하기 직전에는 이미 합격이 손에 놓인 것처럼 수업을 듣는 것에 리듬감이 붙는다. 그 지난한 길에 드디어 아이가 입성했다. 이제 중학생이 되는 아이를 마냥 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어전문학원 한 군데에 등록을 해 주면서 엄마 마음은 갑갑하기 그지 없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나도 그렇게 해서 대학에 들어갔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내 아이가 그 길을 답습한다는 것에 나도 모를 갑갑증을 느낀다.




아이를 데려다 주는 길에는 초록색 버스를 탔다. 버스가 얼마나 오지 않던지 15분을 기다렸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출발했고, 게다가 서둘러 갔지만, 첫 날부터 학원 시간에 겨우 맞추어서 들여보냈다. 돌아 나오는 길에 가까운 브런치 식당에 갔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려고 예약을 하는데, 1월은 비수기라 단축운영을 한단다. 게다가 내가 예약하려는 날은 개인 사정으로 연장운영을 해 줄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원하는 날짜에 예약이 안되니, 다음에 들르겠다고 돌아서 나오는데, 별로 다른 음식점은 예약하고 싶지 않다.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눈에 띄는 식당에나 아이들을 데려 가야겠다. 다시 돌아서 집으로 걸어왔다. 여전히 정체 모를 작은 분노감과 갑갑함, 좌절감이 마음 속에 떠돌아 다닌다.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럴 필요가 없는데…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는데 지금 여기의 내 마음은 왜 이 모양인가…


옷을 건드리는 것이 있어서 보니 가느다란 겨울 나뭇가지가 길 쪽으로 쭉 뻗어 나와서 내 옷을 잡아당긴다. 발 밑이 미끌거려서 내려다보니 그 동안 내린 눈이 얼어붙어서 빙판이 되어 있다. 작은 것이 율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자주 보이지 않던 새가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서 데크길 오른쪽에서 종종거리고 있다. 그 쪽을 바라보니 붉다. “아, 노을이다!” 오늘도 이렇게 노을은 빨갛게 물이 들어있다. 눈이 부시다. 그곳을 조금 더 바라보았다. 붉은 햇볕이 노란 그림자를 환하게 보내고 있다. 빙판길을 피해서 한쪽에 낙엽이 쌓인 곳을 골라 밟았다. 산책로를 따라서 한참을 올라오니 집이 코앞이다. 버스를 타고 간 시간보다, 걸어서 집까지 온 시간이 더 빠르다. 게다가 노을을 보았고 살이 오른 새를 보고 내 옷을 잡아당기는 나뭇가지와 얼어붙은 눈을 만났다.


삶의 예술은 우리 자신에게서, 바로 코앞에서 시작된다. 다른 모든 것은 투사이고 공상이다. 빌헬름 슈미트는 “가장 자신만만한 사람은 일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썼다. (p.42)
프랑크 베르츠바흐, <무엇이 삶을 예술로 만드는가>, 2016, 불광출판사


다시 집이다. 드디어 나를 위한 커피를 한 잔 만들었다. 제빵기에 넣어 둔 밀가루와 우유, 소금, 설탕, 이스트, 버터가 잘 섞여 잘 구워지고 있다. 식빵 구워지는 냄새가 구수하게 난다. 우유를 머그잔에 부어서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믹스 커피 한 봉지를 잘 섞어서 아주 달콤한 커피를 만들었다. 아이폰에서 중저음의 슈베르트 가곡을 플레이 했다. 초록색 인조가죽 노트와 플라스틱 만년필을 꺼냈다. 세 페이지의 글을 빼곡히 쓰면서 내 마음의 독백을 받아 적었다. 그렇게 적어 내는 독백은 내 마음을 살살 달랜다.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의 향이 퍼진다. 음악이 계속 울린다.




아이는 또 다음 날이면, 그 학원에 가야할 테고, 나도 어느 날 또 다시 무슨 일인가를 벌이겠고, 또 다시 좌절하고 넘어지거나 또 다시 실망하고 분노하겠지만, 그런 날에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붉게 환한 빛을 내뿜는 노을과 내 옷을 잡아당기는 겨울 나뭇가지와 시선을 끄는 오동통한 새 한 마리가 통통거리며 시선을 끌고 있을 것이다.


* 표지 사진 출처 : Photo by Luca Brav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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