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내가 내면의 나에게…
인생에는 정답이 없을뿐더러 문제를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하는지 살면 살수록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정답이 없다는 열린 결말이 우리에게 주는 자유로움은 분명히 있다. (p.122)
캐서린 루이스, <내일 삶의 서재>, 2019, 젤리판다
여자의 인생은 40대부터가 아닐까? 10대 때에는 부모의 그늘 밑에서 산다. 아주 잘난 애들이야 부모의 됨됨이에 상관없이 자기 갈 길을 가겠지만, 대부분의 그렇고 그런 측에 속하는 평범한 아이가 부모와 독립적으로 자라기는 쉽지 않다. 운이 좋아서 잘 보살펴 주는, 그리고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부모 밑에서 보호받으며 인격을 가다듬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10대는 부모의 그늘 밑에서 쉽게 지나가 버리고, 20대는 학업을 마무리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느라 사회에서 주는 정답을 찾으려고 한다. 실은 정답이 없는데, 사회가 제시한 정답이 있는 것처럼 찾아 헤매다 보면 시간이 흘러가 버린다. 그러다 30대에는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다 보면 훌쩍 지나고 만다. 40대가 되어서 비로소 거울을 볼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들여다 본 거울 속 얼굴에는 낯선 얼굴이 마주한다. 어느덧 모공이 커지고 잔주름이 켜켜이 숨겨져 있다. 머리칼을 들여다보니, 머리칼은 가늘어지고 흰 머리칼마저 여기저기 눈에 띈다.
흰머리가 성성한데, 이건 웬일인가? 아직 자라지 않은 내면의 아이가 있다. 시기와 질투, 미움이 있고 욕심도 있다. 그럼 이렇게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내면의 아이를 돌보지 않았단 말인가? 변명거리야 많다. 10대 때에는 부모의 그늘 밑에서 공부하느라 바빴고, 20대에는 어색한 사회로 들어가서 사회생활이 무엇인지 배우느라 정신없었고, 연애를 하며 짝을 찾느라 바빴고, 30대에는 꼬물꼬물 한 아이들을 낳아 기르느라 잠도 못 잘 만큼 바빠서 내 내면에 아이가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그러다가 비로소 아이들이 내 키보다 더 커지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볼 틈이 나서 보니, 흰머리는 눈에 띄는데, 내면의 아이는 아직 자라지 못한 것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작은 아이를 학원차량까지 데려다주고 산책을 시작했다. 산책길을 걷다가 내일 동생 송별회에 무엇을 가져갈지 고민을 했다. 욕심이 앞선다. 머릿속에서, 김밥을 쌌다가 풀고, 치킨을 튀겼다가 접었다. 기름 떡볶이를 달콤하게 볶다가 말고 딸기가 생각났다. ‘딸기도 아니다. 이럴 때는 비싼 마카롱이 제격이다.’ 동네에 소문난 마카롱 집에서 뚱뚱한 마카롱을 사가야겠다. 싱싱한 딸기도 좀 사갈까? 동생이 일 년 동안 해외에 나가고 한참을 보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다.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언제든지 전화해서 쉽게 만날 수 있을 때에는 더 좋은 것으로 대접하지 않았을까? 내일 또, 그다음 날도 또, 언제든 전화해서 만날 수 있을 때에는, 왜 더 소중한 것으로 대접하기보다는 집에 있는 흔한 음식을 차려 두고 먹었을까? 보내는 때가 언젠가는 올 것이고, 또다시 만나는 날이 올 텐데, 지금 이 순간의 진심에 귀 기울이고, 가장 찬란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며 지낸 건지…. 모호하게 드리운 벽을 느끼며 사람을 대하는 순간에 나의 진심과 상대방의 진심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허상과 대화를 한 것은 아닌지…. 동생의 송별회를 앞두고, 아직 동생이 한국에 있을 동안에 함께 시간을 누릴 시간을 앞두고, 40대의 나는 내면의 나에게 매 순간 진심을 다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있다.
* 표지 사진 출처 : Photo by Brooke Lark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