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가는 것이 가장 빠르게 가는 것
나갈 마음이 있어서 나간 것은 아니다. 나가기 전에 말이 먼저 있었다.
아이가 학원을 마치고 바로 다른 학원에 보충이 잡혔다고 한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나가면 아이가 엄청 서둘러야만 겨우 일정을 맞출 수 있다. 그러니 아이가 첫번째 학원을 마치는 곳에 내가 마중을 나가고 그 근처에서 저녁을 사 먹이고 다음 학원시간으로 바로 보내는 편이 낫겠다. 별로 저녁시간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겠노라 했다. 아이를 마중나가는 것이 의외로 큰 일을 했다. 집에서 방바닥과 합체가 되어 놀던 작은 아이가 ‘심심해’를 외치다가 형을 만나러 나갈 시간을 그렇게 기다릴 줄이야… 점심을 먹고 졸리던 차에, 낮잠이나 잘까 고민하던 나는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인지하고부터는 잠도 뿌리쳤다.
나갈 시간이 다가오자,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의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청소기를 돌렸다. 눈에 띄는 곳을 대충 정리하고 보니 재활용 쓰레기가 산더미다. 재활용쓰레기는 매 주마다 싹 가져다 버리는데도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금 산더미처럼 쌓인다. 음식을 좀 배달해서 먹으면 더욱 쌓여버린다. 작은 아이와 나가는 김에 아이 손에도 재활용쓰레기를 들리니 내 손이 한결 가볍다. 쓰레기까지 다 버리고 나니 대출한 책을 반납할 날이 지난 게 생각난다. 나가는 길에 도서관에 먼저 들렀다. 도서관이 문닫기 직전이다. 재빨리 빌릴 책을 빌려서 가방에 넣고 가져온 책을 반납했다.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아이 학원까지는 버스를 한번만 타면 되고 심지어 몇 정거장 되지도 않는데, 그 초록 버스는 너무 띄엄띄엄 온다. 배차간격이 17분이 되니 기다리는 시간은 길게만 느껴진다. 버스가 종점에서 출발도 안 했는지 버스 도착 시간도 확인이 안된다. 무수한 생각들… 다른 정류장으로 걸어가서 다른 버스를 탈까 하다가 이미 오래 걸어서 힘들어하는 작은 아이를 데리고 또 걸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바쁘게 움직이던 마음을 얼른 잡아채 왔다. 그리고 다시 내 마음을 안온하게 붙들어 매고 호흡을 길게 한다. 내 마음에 집중한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작은 아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하늘에 환하게 떠있는 커다란 달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집을 나설 때에도 보름달만한 달이 있었고,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는 동안도 환한 달이 있었다. 도서관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에도 만났던 달이다.
“모든 평범한 일상을 천천히, 그리고 빈틈없이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잔디가 자라는 소리와 다람쥐의 심장박동 소리까지 들릴 것이다. 늘 그렇듯이 가장 빠른 자가 어리석음으로 똘똘 뭉친 채 돌아다닌다.” (p.111)
사라 밴 브레스낙, <혼자 사는 즐거움>, 2011, 토네이도미디어그룹(주)
버스정류장에 서서 하얀색 달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마음으로 들으니 귓가에 음악이 쟁쟁하다. 휴대폰 대리점에서 플레이한 가요가 크게 들린다. 평소라면 소음이라고 생각했던, 강요된 음악이다. 하지만 그 시간의 달과 어두워지는 사위와 애잔한 우리 가요가 제법 잘 어울린다. 흔하고 흔한 사랑 노래다. 어쩜 그리 사랑 노래는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지…. 20년 전에도, 그보다 더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아마도 20년 뒤에도, 그렇고 그런 사랑노래는 반복되겠지… 그 흔하고 흔한 가사를 음미했다. 그리고 곡을 음미했다. 평범한 음악이지만 가사에 맞게 끝을 흐리는 음이 마음에 들었다. 절절한 사랑 타령에 맞지 않는 강한 가사의 말미에 의아했는데, 끝을 흩뿌리듯 가볍게 날려주니 조화롭다.
잘 지어진 가요를 들으며 글 쓰기를 생각한다. 오랫동안 써오고 있는 글. 내가 가장 자유로움을 느끼는 행위인 글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글을 통해 이렇게 어떤 흔적을 남기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을 떠올린다. 이렇게 쓰는 글에 조그만 추임새를 넣어가며 자족하는 나의 모습을 떠올리고, 지금 내 귓가에 들려오는 가요를 작곡한 유명한 작곡가가 가사의 끝음을 흩날리면서 지었을 미소를 떠올렸다. 배차간격이 17분이나 되는 초록색 버스가 계속 차고지에서 쉬고 있더니, 어느새 곧 도착으로 바뀌어 있다. 가만히 기다리길 잘했다. 작은 아이가 더 걷기 힘들어 할까 봐 여기에 계속 서 있었는데, 버스는 빨리 왔다. 그리고 동동거리지 않고 내 마음에 집중한 그 시간에 하얗게 찬란한 달이 마음에 들어왔고 가요의 꾸미는 음이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작곡가의 미소를 떠올렸다. 첫째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 표지 사진 출처 : Photo by Margit Bantowsky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