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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미소리 Jun 21. 2024

몇 백 원이 만들어낸 것들

작은 아이가 겉절이를 좋아해서 자주 만든다. 가끔은 얼갈이와 열무순으로 겉절이를 하고, 어떤 날은 오이와 양파를 가볍게 무치지만 배추 겉절이가 제격이다. 집에서 대량으로 김치를 담그는 일은 거의 없고, 조그만 알배기 배추(배추의 속 부분만 파는 배추)를 사서 금방 겉절이를 하는데, 이번에는 진짜 포기 배추를 사가지고 왔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가 있었던 거는 아니다. 주말에 가족들이랑 차를 가지고 갔으니, 집까지 이고 지고 갈 걱정 없이 무거운 식재료도 카트에 담다가 배추를 발견했다.


커다란 포기 배추가 2400원, 작은 알배기 배추도 뭐 그 비슷한 가격이었다. 몇 백 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 잠깐 고민에 빠졌다. 저렇게 커다란 배추는 사가지고 가봤자 처치 곤란이니 곧 썩어서 통째로 버리는 수가 있다. 작은 알배기 배추는 손질이 쉬우니 무난한 선택이다. 그때, 마트에 따라 나오지 않은 작은 아이 얼굴이 생각났다. ‘이 참에 제대로 큰 배추로 겉절이를 해 주면 잘 먹었지?’ 큰 포기 배추를 카트에 담았다. 장고 끝에 배추를 집에 데려왔으나, 손이 조금도 가지 않는다. 집에는 큰 배추를 감당할 만한 다라이도 없다. ‘저것을 어쩐다, 저쩐다, 저러다 썩어 버리겠는데.’ 고민을 하다가, 며칠 만에 꺼내 보았다. 아직 상한 곳은 없었다. 이것을 다 손질하려면 집에 있는 보울을 다 꺼내야 할 것 같다. 큰 다라이를 살까도 잠깐 고민했지만, 큰 다라이를 쓰려면 부엌 싱크대가 아니라 베란다를 이용해야 하니 먼저 베란다를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아무래도 이렇게 큰 배추를 한 번에 다 손질하기는 무리다. 배추의 겉잎을 몇 장 떼어냈다. 배추는 포기가 커도 겉잎을 몇 장씩 떼어 내다보면 크기가 훅 줄어든다. 평소에 구입하던 알배기 배추와 큰 포기배추의 중간쯤 되는 사이즈가 되었을 때, 배추 손질을 시작했다.



대충 씻어서 4등분을 하고, 보울에 담은 채로 어슷 썰기를 했다. 그리고 굵은소금으로 절여 두었다. 뜯어낸 겉잎은 깨끗이 씻어서 냉장고에 옮겨두고, 절이는 배추를 뒤적였다. 그리고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양파를 몇 개 다듬어서 길쭉하게 썰고 겉절이 양념을 만들었다. 대접에 멸치액젓을 좀 붓고 고춧가루와 설탕을 넣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게 양념의 끝이다. 마늘과 생강, 사과나 배 간 것, 혹은 밀가루나 쌀가루 풀을 넣어도 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만 양념을 해도 시원하고 아삭한 겉절이를 만드는 데는 손색이 없다. 오히려 깔끔한 맛에 부담 없이 먹게 된다. 배추가 좀 야들야들해지면 깨끗하게 두어 번 헹군다. 양념을 다 준비하고도 배추가 아직 풋풋한 기운이 있었지만 그냥 무쳤다. 숙성되면 다 간이 밴다. 헹군 배추에 양파와 양념을 넣고 버무렸다. 맛을 보니 싱겁다. 전에 담근 배추에 비해서 이번 배추가 양이 많았다. 다른 양념 추가할 것 없이 멸치액젓만 몇 큰 술 더 넣고 버무렸다. 통에 담고 보니, 우리 집 유리통 중에서 가장 큰 통에 담고도 작은 유리통에 가득 들어간다. 맛도 개운하고 양도 넉넉하니, 마음이 부듯하다. 저녁에 작은 아이 밥상에 겉절이를 올려줬더니 역시나 잘 먹는다. 무엇으로 간을 했냐고 묻기에, 역시나 뒤에 따로 넣은 멸치액젓 맛이 강하게 나고 약간 따로 노는 것 같은가 싶어 아이의 표정을 보았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다행히 겉절이는 어지간하면 맛있다. 파, 마늘을 안 넣어도 양파가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한다.



다음 날, 남은 배추 겉장을 해치우려 마음을 먹었다. 평소에 양배추 참치 볶음을 자주 하는 편이다. 양배추를 채 썰어 볶다가 통조림 참치 한 캔을 넣고 볶으면 끝이다. 간이 부족하면 소금과 후추를 조금 추가하면 된다. 달걀 프라이를 해서 곁들이면 맛있는 덮밥을 만들 수 있다. 양배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가족들도 양배추 참치 볶음은 잘 먹는다. 적양배추로 하면 색깔이 좀 오묘한데도 맛은 좋다. 그러니 양배추를 한 통 썰어 두었다가 빨리 소비가 되지 않는다 싶으면 이렇게 볶곤 한다. 게다가 양배추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남아도는 양배추를 양껏 사용해도 숨이 죽어서 양이 훅 줄어드니 이 음식처럼 양배추 먹기에 좋은 반찬도 별로 없다. 이번엔 양배추 대신 배추 겉장을 이용했다. 양배추나 배추나 배추는 배추니 뭐 별다를 게 있나 싶다. 손질해 둔 배추를 손으로 쭉쭉 찢었다. 적당한 크기로 찢은 배추를 팬에 올리고 숨이 죽을 때까지 두었다가 참치 통조림 한 캔을 넣고, 소금 대신 멸치액젓으로 간을 했다. 양배추는 소금간이지만 배추에는 액젓 간이 더 땅긴다. 간이 어우러지도록 볶으니 꽤 괜찮은 음식이 완성됐다. 간이 심심해서 배추를 많이 집어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다. 아이 밥상에 올려주니 맛있게 한 팬을 다 먹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싸서 사온 배추로 알뜰하게 겉절이에 볶음요리까지 해 먹고 버려지는 부분 없이, 냉장고 통에 뿌듯하게 자리 잡은 겉절이까지…. 며칠 뒤에 외출을 했는데, 작은 아이에게 카톡이 온다. “엄마, 나 김치통 엎었어. 이걸 어떻게 치워?” 작은 아이가 나 없는 틈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라면을 대접했다. 그러다가 냉장고에서 김치통을 잘못 기울여 거의 다 엎어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배추의 수난이 아닐 수 없다. “김치 국물이 냉장고에서 말라버리면 치우기 힘드니까 잘 닦아두라.”고 하고 집에 오니, 김치를 닦아낸 냅킨과 휴지가 산더미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정리해 둔 아이가 기특하기도 하고, 버려진 김치가 아깝기도 한데 생각보다 통에 겉절이가 많이 남아있다. 다 버려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대도 안 했는데, 국물만 엎었지 겉절이는 많이 남아 있다.


이것은 죽다가 살아나고 살다가 죽을뻔한 배추 한 포기에 대한 이야기다. 500원의 선택으로 배추 겉절이에, 배추 볶음, 그리고 이야기까지 만들어졌으니 500원 때문에 한 장고가 헛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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