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노트를 버리며….

by 소미소리

모닝페이지(일기처럼 매일 아침 세 페이지의 글을 빠르게 쓰는 것)를 오랫동안 써 왔다고만 생각했지, 얼마동안 얼마나 썼는지 헤아려 보지 않았고, 두 번 다시 모닝페이지 노트를 꺼내어 읽는 일도 거의 없었다. 두서없이 노트를 차곡차곡 쌓아서 쟁여 두기만 했으니, 노트를 넣어두는 선반이 가득 차서 넘치도록 되었지만 어쩌지 못하고 그냥 두었다. 그러다가 이사를 앞두고 장롱과 서랍을 열어젖히고 정리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 널브러진 노트들을 그냥 쌓아두고 이삿짐 견적을 알아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일단 노트들을 다 꺼냈다. 이미 지나간 노트이고 고이고이 두고 읽을 일은 없으니 모두 버리고 싶은데, 재활용에 내놓기도 찜찜하다. 혹시나 누군가 내 노트를 재활용 쓰레기 가운데서 꺼내어 읽어볼 일은 거의 없으나 그래도 생 것 그대로 적힌 노트를 그렇게 내놓을 수는 없다. 싹 다 태워버리면 좋겠는데 아파트 생활이니, 노트 몇 권 정리하겠다고 집에 화재경보기가 울리도록 둘 수도 없다. 일단 노트를 다 꺼내고 보니 10권도 넘는다. 뒤죽박죽 섞인 노트를 연대기순으로 정렬했다. 2019년이 시작이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동네에 예술하는 지인이 살았고 그 지인 추천으로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읽었던 해다. 아티스트는커녕 직장인으로 매일매일 성실과 성심 사이를 오가며 살던 때에 웬 예술가의 길? 나와 어울리는 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다만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다. 예술가가 아니어도 자신 안에 있는 예술가 기질, 다시 말하면 어린 시절의 자유로움과 감수성을 다시 꺼낼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책이었다.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원하는 길로 가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매일 세 페이지씩, 일어나자마자 새벽 댓바람부터…. 그렇게 나의 모닝페이지는 시작되었다.



무슨 생각으로 모닝페이지를 실행에 옮겼는지는 기억에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가 삶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였다. 직장 생활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대학원에 등록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가사와 육아, 그리고 풀타임 직장인으로 생활하던 때였으니, 내게 주어진 일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에너지가 샘솟았고, 새로운 일을 벌였다. 모닝페이지도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글쓰기에도 재미를 붙였으니,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던 때였으리라. 그때부터 시작해서 꾸준하고 성실하게 모닝페이지가 채워져 있었다. 그림을 많이 그렸던 때도 있었다. 모닝페이지가 비워진 날이 채워진 날보다 더 많은 시기도 있다. 지금도 모닝페이지를 쓰고 있지만 꼬박꼬박 쓰지는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쓰기도 하고 서너 번 쓰기도 한다. 자유로운 횟수로 쓰지만, 일단 쓰는 날은 가능하면 이른 시각에, 그리고 한번 쓰기 시작하면 세 페이지를 채운다. 모닝페이지는 세 페이지까지 가봐야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가 나온다. 자신에 대해서 알기를 원한다면, 의미 없어 보이는 글일지라도 세 페이지를 채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노트가 크든 작든 세 페이지를 채우고 보는 거다. 그렇게 쓰고도 아무 의미가 없는 날은 없다. 적어도 마음의 평안을 확인할 수 있다.


모닝페이지가 빼곡히 적인 노트를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기로 정했다. 그냥 다 욱여넣자니 뭔가 아쉽다. 그래서 처음 것부터 노트를 들추기 시작했다. 나도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로 써진 노트와 노트의 상태가 잘 보존되지 못한 것은 찢어서 종량제 봉투에 넣었다. 글씨체도 반듯하고 그림도 섞여 있는 노트는 버리기 아까웠다. 절반은 폐기하고 절반은 잘 정렬해서 장롱에 정리를 해 두었다. 글씨를 흘려 썼을 때에는 다시 꺼내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테니 버릴 노트를 구분해 내기가 쉽다. 무의식적으로 글씨를 흘려 썼을지라도 매우 강력한 방법이다. 버리고 싶은 글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글을 흘려 써버리면 된다. 노트를 정리하다 보니 지나간 시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시간을 헤쳐 나가는 과거의 나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 시기에는 글보다 그림이 더 많았다. 글은 나를 객관화하게 해 주지만, 그림은 그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위로하는 효과가 있나 보다. 남이 쓴 글을 보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기는 하지만, 글을 쓰는 행위가 주는 위로감은 그림보다는 간접적인 것이었는지, 가장 마음이 아픈 시기에는 그림이 위주였다.


사진: Unsplash의freestocks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고 있다. 1998년작 영화를 먼저 보았는데, 영상미가 좋았던 것과는 별개로 별 감동이 없었던 터라 원작을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최근에 1946년작 흑백영화를 유튜브로 보게 되었는데, 마음을 울리는 부분을 발견했다. 주인공 핍이 놀러 간 저택의 주인인 미스 해비셤은 젊은 날의 상처로 모든 시간을 멈춰둔다. 결혼식 당일의 파혼은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그 상처에 그녀의 삶도 멈춰버린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응접실에 놓인 커다란 웨딩케이크와 성찬도 그대로다. 시간이 흐르면서 웨딩드레스는 누렇게 뜨고, 먹음직했을 웨딩케이크에는 쥐와 벌레가 들끓고 거미줄과 먼지가 켜켜이 쌓인다. 지나간 일이란, 제때에 흘려보내지 않으면 변질되고 만다. 크게 충격적인 일이었을지라도, 심지어 결혼식에 신랑이 오지 않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 시간을 보내주지 않으면 더욱 악화될 뿐이다. 미스 해비셤은 자신의 상처에 마음을 쓰느라 타인이 받는 상처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된다. 애꿎은 어린 핍은 미스 해비셤의 기괴한 장난에 씻지 못할 상처를 입는다.


모닝페이지를 벅벅 찢어버리면서 그 당시에 내가 느꼈던 절실했던 어떠한 사건과 감정들도 함께 폐기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무작정 노트가 완성될 때마다 장롱 깊이 찔러두고 말았는데, 그 노트를 꺼내어 읽고 그때의 감정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그리고 기뻤던 일과 감사한 일을 마음에 쌓아두고, 치열했던 감정과 사건들을 깨끗하게 씻어내듯 종량제 봉투에 차곡차곡 담았다. 모든 감정과 사건에는 그럴법한 이유가 있었고, 어떠한 감정도 틀리지는 않지만, 잊을만한 때에 잊어버리고 보내 버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