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카메라타

by 도르가

같은 자리에서 흐르는 시간


아주 오래전 파주 헤이리에 간 적이 있다. 황인용 선생님이 하시는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를 오랜만에

오늘 다녀왔다. 좀 이른 시간 자유로를 달려 도착한 곳에는 황인용 선생님께서 아침 운동을 하시고 천천히 내려오고 계셨다. 사실 워낙 공인이신지라 나는 황인용 선생님을 알지만, 선생님은 나를 모르니 다가가 인사하기가 쑥스러워 먼저 음악홀로 들어왔다. 선생님의 느린 걸음이 느껴질수록 헤이리의 공기는 조금 느린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을 20년 전에 뵐 때와 외모는 조금 변하셨지만, 평생 음악과 함께 사신 분이시라 그런지 백발의 모습과 느린 걸음이 더욱 멋지셨다. 벌써 85세가 되셨다니.

카메라타의 문을 열자마자 아름다운 선율이 공간을 단단히 채우고 있다. 사람들은 말없이 그 안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내려놓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나를 침묵 속에 머물게 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오래된 종이처럼 부드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것은, 공간의 중심에 여전히 같은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선생님은 매일 그 자리에 나와 있다고 한다. 느린 걸음 속에 흐트러지지 않은 동작과 얼굴에는 긴 세월을 통과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평온이 베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공간을 가득 채운 음악을 한동안 들었다. 입장할 때 주문한 라떼 한 잔이 마음과 몸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머물 공간에서 음악과 함께 읽을 책《습관의 말들》을 펼쳐 글을 읽어 내려갔다.

아, 참 좋다. 오래전에 머물렀던 공간이 변하지 않고 이렇게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독특한 건축구조가 아름다웠다. 이곳은 LP판을 직접 골라 플레이해주는 곳이다. 새로운 곡이 나올 때마다 화이트보드에 앨범과 곡의 이름을 직접 적어 두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LP판의 잡음까지 거슬리는 것 없이 공간이 주는 힘은 대단했다.오래전부터 헤이리 마을의 많은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처럼, 건물도 결국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그러나 어떤 장소는 건물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물러 온 사람 때문에 살아남는다. 카메라타가 그랬다. 음악이 흐르는 이유도,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는 이유도, 결국은 한 사람이 지켜온 시간 때문이었다. 그곳에 앉아 책을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떤 삶은 빠르게 확장되지 않는다. 대신 같은 자리에서 깊어진다. 깊어지는 삶은 눈에 띄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오늘의 공기 속에는 묘한 그리움이 섞여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 추억을 떠올렸고, 시간이 이렇게도 한결같을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한 자리를 지키는 일은 반복과 지루함을 오래 견뎌야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인용 선생님은 여전히 음악을 틀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김훈 작가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은 자기 삶의 자리를 지키며 늙는다.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머무는 동안에 시간은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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