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틴다는 말이 나를 소모시킬 때
지난 몇 해를 "잘 버텼다"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버틴다는 말에는 분명 미덕이 있다. 쓰러지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고, 도망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버틴다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말은
늘 어금니 물고 양손을 두 주먹 불끈 쥐고 힘을 주는 것이 연상이 되었다.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모습.
나의 속마음은 '안쓰러움'이 들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애쓰면서 살아왔을까. 버틴다는 말은 나를칭찬하면서도 동시에 나를 계속 긴장 상태로 묶어두는 듯 했다. 반면, 기다린다는 것은 수동적인 멈춤이 아니라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싹이 틀 때까지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하며 햇살과 바람을 믿는 마음이다. 즉, 기다림은 ‘내일의 나’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능동적인 자세이다. 올해는 나를 갉아먹는 인내가 아니라, 나를 채우는 설렘으로 시간을 채워가야 한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가장 건강한 사람도, 가장 영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들, 즉 기다려야 할 미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빅터 프랭클 (Viktor Frankl) - 『죽음의 수용소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손을 놓는 것이 아니다
‘버틴다’라는 것은 무거운 갑옷을 벗고 ‘기다리다’라는 희망의 옷으로 갈아입는 시간이기도 하다.
버틴다는 것은 외부에서 몰아치는 비바람에 맞서 근육을 잔뜩 긴장시킨 채 버티는 상태이다. 반면, 기다린다는 것은 수동적인 멈춤이 아니다. 기다림은 ‘내일의 나’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올해는 나를 갉아먹는 인내가 아니라, 나를 채우는 설렘으로 시간을 채워가야 할 것이다. 기다림은 체념이 아니라 인내함이다. 오늘 할 일을 하면서, 나에게 올 다음 시간을 인애하며 기다리는 신뢰하는 태도이다. 당장 답이 없어도 기다려보자 버티며 기다린 시간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마음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십시오.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질문들을 살아가십시오. 그러다 보면 먼 미래의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해답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매일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꾸준함이 결국
자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고 썼다. 고명환 작가도 이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기다림은 가만히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시간인 것을 나는 믿는다.
26년, 나는 기다림을 선택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생의 주기를 지나고 있다. 누군가는 사회적 성취의 정점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제2의 인생이 피어나길 기다리며, 또 누군가는 평온한 노후의 안착을 기다릴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소모하며 견디는 것'과 '나를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의 한 끗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버티는 사람은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무게에 함몰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마중 나가는 과정이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알을 깨는 순간보다, 그 시간을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오늘 당신이 정성껏 차려 먹은 한 끼 식사, 업무 책상을 정리하는 손길, 가족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단순히 오늘을 버티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이다. 26년을 '버티는 해'가이니라 '기다리는 해'로 부르고 싶다. 오늘의 나를 다 써버리지 않고, 내일의 나를 남겨 두는 선택, 기대는 소리 없이 오늘도 자라난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버티지 않아도 된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시간은 반드시 응답한다. 26년이 끝날 무렵, 거울 속의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올 한 해 참 잘 기다려주었구나. 덕분에 나에게 아름다운 순간을 만났어."라고. 기다림이 헛되지 않도록 올 한 해 모든 시간 위에 빛나는 설렘이 매일 깃들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우리는 기다린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지루해할 수도 있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기다림 그 자체가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사무엘 베케트 (Samuel Beckett) - 『고도를 기다리며』
"기다림은 아프다. 잊는 것 또한 아프다. 하지만 무엇을 결정해야 할지 모르는 고통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원한다면 온 우주가 당신을 돕는다."
파울로 코엘료 (Paulo Coelho) - 『연금술사』
코엘료는 기다림의 고통 뒤에 숨겨진 희망의 에너지를 말한다.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히 알고
있을 때, 그 기다림은 더 이상 버티는 아픔이 아니라. 나를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나는 오늘 글을 쓰면서 버틴다는 말이 이렇게 힘을 주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는
버티는 것보다 기다림의 시간을 만나려고 한다. 우리 모두가 새해 26년에는 온 우주가 나를 돕는
시간들을 만나길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