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의 원리

창조성은 영감이 아니라 성실한 반복에서 나온다.

by 괜찮은

나는 창조적인가?

창조성 여부의 문제는 디자이너를 준비하던 학생 시절부터의 고민으로 스스로 ‘나는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 사실이라 믿었기에 더 지긋지긋했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더 부끄러웠던 '창조성 부재'라는 낙인.


돌이켜 보니, 그것은 성급한 자기 확신이었다.

완벽하지 못한 완벽주의자가 어설픈 결과물에 대한 혹평을 견뎌내기 위해 찾아낸 변명거리가 "나는 창조적이지 못해서 그래"였고, 그 변명이 마음속 주제가가 되고 습관이 되고 확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20년 넘게 살았으니 창조적인 인간으로 사는 게 가능했겠는가.


사실 내가 생각하는 '창조적인 디자이너'는 그저 디자인을 보기 좋게 잘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참신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디자인 원리에 맞는—그래서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편안함과 안정감 또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매력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다. 원리적인 것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기능인으로서 디자이너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창조성이 필요해!"라는 의견은 잠시 접어두자.


중요한 건 내가 생각하고 원하던 '창조적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굳이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되는 ‘창조적’인 인간이 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나의 패착은 나의 게으름을 창조성 뒤에 숨긴 것, 타인의 평가를 쉽게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개선이 부족했던 것, 창조성은 선천적 재능이라 생각하며 한탄한 것, 그리고 기능적인 배움마저 소홀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나의 발목을 잡던, 아니 그토록 잡으려 애썼던 '창조적인 디자이너'란 직함을 내려놓고 회사를 걸어 나오던 날, 막막함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더 이상 창조적일 기회가 없을 거라는 공허함이었다.

그 공허함만큼 시간의 여백이 생긴 나는 매일 도서관에서 소속감을 찾았다. 서가에서 꺼내온 책들을 쌓아두고 가만히 책등을 바라보니 디자인과 창조성에 관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있을 때 잘할 것이지…’

마지막까지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디자인에 대한 애정은 진심이었나 보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렇게 애틋하다니, 애증을 체험한다.


2026년, 오늘의 나는 창조적인가?

퇴사 후, 이것저것 시작했다가 완벽하지 않으면 그만두길 반복했다.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핑계는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던 중 ⟪아이디어 물량공세⟫란 책에서 “창조성은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있지만, 더 많은 걸 해보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게 되었다. 창조성이 벼락같은 영감이나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더 많은 걸 해보는 것’이 얌전히 적힌 문장처럼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다. 그 말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반복되는 자기 의심과 자기 확신의 굴레를 견뎌내는 끈기와 용기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창조성이란 단 한 번의 번뜩임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시 시도하는 반복의 과정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었다.


디자인에서 반복(Repetition)은 단순히 똑같은 것의 나열에서 오는 단조로움이 아니다. 오히려 반복은 흩어지기 쉬운 시각적 요소들을 하나의 구조로 묶어내는 가장 정직하고 강력한 방식이다. 설령 완성도가 부족해 보이는 요소라 할지라도, 일정한 규칙 안에서 다시 등장하고 쌓일 때 그것은 비로소 실수가 아니라 의도로 읽힌다. 반복은 결과의 아름다움을 말하기에 앞서, 과정에 리듬을 부여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삶에도 반복은 늘 있었다. 다만 그것은 나를 하나의 완성된 디자인으로 만들지 못하는 ‘단절의 반복'이었다. 완벽의 부담 앞에서 멈춤,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비관, 그리고 시도와 포기의 되풀이. 그것은 삶의 질서를 만드는 리듬이 아니라 불협화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 나는 반복의 방향을 바꿔보려 한다. 다시 자리에 앉는 일, 미완의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일, 서툰 획을 긋는 이 작은 행위들이 당장 완벽한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아도 좋다. 디자인에서 반복이 구조를 만들듯, 삶에서의 반복은 단단한 용기를 만들어줄 것이다. 단번에 창조적인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오늘의 시도가 어제와 연결되고, 내일의 또 다른 시도로 이어진다면, 나는 이미 나라는 인생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창조성이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막막한 날에도, 혹은 어설픈 결과물에 실망한 날에도 다시 자리에 앉아 '한 번 더'를 시도하는 정직한 태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반복-1.jpg 반복(Repet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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