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에는 단발머리

by 소믈리연
Gemini_Generated_Image_cpqm4pcpqm4pcpqm.png

머리를 잘랐다. 머리카락을 잘랐다. 25cm 이상을. 긴 머리 8년 인생은 3초 만에 가위 끝에 사라졌다.

열흘 전, 뿌리 염색을 하러 갔다. 시간이 없어서, 돈이 아까워서, 귀찮아서 등을 핑계로 석 달을 버텼다. 날이 갈수록 빠지는 머리숱은 줄어드는데 흰머리는 늘어난다. 화장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동공과 눈꺼풀을 가까이해서 거울을 본다. 3cm 이상이나 자란 까만 머리와 흰머리가 퐁당퐁당 쫀디기 처럼 줄지어있다. 모자 쓰면 두피 간지러움이 더 심해진다. 흰머리 날 때 그렇다던데, 또 그 시기인가 보다. 참다못해, 미용실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8호, 9호 염색약을 바르는데 이날은 4호를 바른다고 했다. 숱 많고 모발도 굵고 곱슬기까지 있어, 약 바르고 다른 사람들보다 5분 정도 더 기다린다. 그런데 이날은 5분 일찍 샴푸했다. 이미 색이 잘 나왔다고. 잘 나오긴 했지만 뭔가 찝찝했다.


일주일 후, 거울을 보는데 앞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줄기 껍질을 벗긴 듯, 세포막처럼 벗겨지는 검은색 사이에 흰색이 보인다. 갈색 비스름한 모발이 몇 가닥이나 보인다. 보통 한두 달은 유지하는데. 머리를 감았다. 드라이하고 나니 아까보다 더 심하다. 전화를 할까 말까. 염색이 벗겨졌다고. 오라 해도 갈 수 없는 상황. 서울에 일정이 있었다. 1박 2일 동안. 일행들과 서울로 출발했다. 다음날 토요일 오전. 호텔 화장실 거울을 보는 데 어제 보다 더 심했다. 노르스름한 조명이 흰머리만 비췄다. 한 두올도 아니고 너무 많다. 열흘 전과 같다. 일단 오전 일정을 소화하고 대구로 내려왔다. 도착하니 오후 세시. 미용실 문 닫기 전에 전화를 걸었다. 지난주 수요일에 뿌리 염색했는데 벌써 다 벗겨졌다고. 여차저차 상황을 설명하니 월요일에 오라고 했다. 그리고 사진 찍어 보내줄 수 있냐고 하셨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고개를 숙인 채 서너 장 찍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바로 올 수 있어요?"

"지금요?"

"남편이랑 볼 일 있어서 나가려고 했는데, 궁금해서 안 되겠어요. 지금 올 수 있으면 올래요?"

"아, 네."

밤새 다섯 시간도 못 자서 눈이 퀭한데. 밖에는 비도 왔다. 월요일은 나도 가기 힘들긴 했다. 집에 들어간 지 3분 만에 다시 나왔다. 30분 걸려 도착했다. 손님은 나뿐이었다.

"어머, 진짜네. 이런 적이 없는데."

"그날 평소랑 다른 호수 써서 그런 거 같아요. 샴푸도 일찍 했고."

"색이 잘 나와서 했던 건데, 이래저래 미안해요. 다시 해줄게요."

가운을 걸치고 앉았다. 왕복 한 시간에 머리 하는 시간도 추가다. 미루고 미뤄서 오는 미용실을 한주에 한 번씩 가다니. 원래 하던 색으로 꼼꼼하게 발라줬다. 평소보다 더 세심하게. 시간이 꽤 걸릴듯했다. 폰을 열었다. 그동안 고민하던 단발머리를 검색했다. 30분이 지났다. 샴푸 하는 동안에도 단발머리 생각뿐이었다. 원장님이 뭐라고 하시는데 집중도 안 됐다. 드라이하러 다시 앉아서도 계속 폰만 보고 있었다.


첫째 아이를 낳고 단발머리로 살았다. 5년을.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에 나오는 배우 김희선이 너무 예뻤다. 나이 들면 다 단발이나 숏컷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 분은 늙지도 않나. 나도 이렇게 긴 머리를 갖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는 터라, 긴 머리를 갖는다는 건, 긴 시간과 인내심을 요구했다. 거지 존에서도 오래 머물러야 하는데. 어떻게든 되겠거니,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서서히 기른 머리를 8년 동안 유지했다. 올해 들어 거울에 비치는 흰머리, 빗질에도 수수수 빠지는 머리카락이 마음에 걸렸다.


'다시 단발로 자를까. 후회하면 어쩌지. 전보다 더 안 길면 어쩌지.' 다른 일은 빠르게 실행하면서, 이 고민 앞에 선 꽤나 망설였다. 원장님이 염색약을 바르는 동안 계속 '예쁜 단발 컷'을 검색했다. 사진도 여러 장 캡처했다. 모든 디자인이 다 예뻐 보였다. 원장님은 모델이 예뻐서 그렇게 보인 댔다. 오른쪽 손가락 두 개로 사진마다 얼굴을 가렸다. 이래도 보고 저래도 보고. 안정권을 추구하고자 중 단발로 가기로 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귀밑까지 오는 단발만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그다지 짧지도 않아 보였다.

"이 사람들은 얼굴이 주먹만 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우리 같은 사람은 이렇게 안 나와요."

그 말에 다른 사진을 더 찾았다. 사지 선다형, 4장으로 줄였다. AI 앱을 열었다. 캡처한 사진 4장과 내 얼굴을 넣었다. 나한테 어떤 스타일이 잘 어울릴 거 같냐고, 이미지로 그려달랬다. 다소 오래 걸려 도착한 사진은 뭐, 그냥 그랬다. 90년대 복고 느낌만 풍겼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머리로 골랐다.

"진짜 후회 안 하죠? 나는 해 줄 수 있지만, 본인 마음이 내키지 않거나 완벽하게 준비 안된 거면 안 해줄 거예요. 안전하게 가려면 중 커트로 하든지."

"아니요. 그냥 이렇게 해주세요. 기부하는 기준이 몇 센티죠? 되면 저도 기부할게요."

아직 덜 마른 끝부분을 한 움큼 잡더니 댕강 잘랐다. 8년 동안 기르고 자르길 반복하며 공들인 머리카락이 가위질 한 번에 끊겼다. 이토록 냉정한 가위 같으니라고. 기부할 수 있게 옆 테이블에 정갈하게 놓아뒀다. 저만큼 사라진 것도 놀라운데 아직도 잘려나갈 부분이 많았다. 이래저래 세심한 손길이 머리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을 오갔다. 30분이면 되겠지 했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원장님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기분전환이 됐다. 묵혀둔 숙제를 한 듯. 연말, 연초는 새로운 다짐도 하는데, 시기도 적절했다.

여차저차 미루던 일을 내친김에 해버렸다. 다소 어이없는 상황, 황당무계한 결심으로.

총 2시간 반을 있었다. 예쁘게 드라이까지 하고. 원장님, 나 둘 다 만족스러운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에 가는 길. 우리 집 세 남자 반응이 궁금했다. 긴 머리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분명 뭐라 할 게 뻔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엄마 왔어?"

"어! 이게 뭐야?"

"엄마, 왜 그래?"

"여보, 머리 잘랐어?"

모두가 내게서 멀어졌다. 눈은 커지는데 표정은 일그러지며.

"다시 길러!"

이걸 어찌 기르냐. 딱풀로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과 달리 나는 평온했다. 기분 좋았다. 3 대 1. 그들보다 내가 느끼는 만족에 대한 밀도가 높으면 됐다. 한동안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을 거 같다. 어차피 천천히 자라는 머리카락이라 긴 머리로 도착하는 데까지 시간도 걸리니까. 그런데 아마, 단발로 조금 더 살 거 같다. 점차 익숙해질 테니까.


『40에는 긴 머리』라는 책을 재밌게 봤다. 그 책을 보면서 공감했다. 지금은 다르다. 40대 중반에 다시 단발머리. 왠지 지금이라야만 할 수 있을 거 같다. 용기 낼 수 있을 거 같다. 그것도 내친김에.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명작가만의 은근한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