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내내 반장, 부반장 한 번 해본 적 없다. 총무도 분단장도.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리더십이 있다고 불릴 만큼 사람을 이끈 적도 없다. 선생님 기억에 남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게 편했다.
그런데 내가 총무가 됐다. 편입한 학교에서 학우들 회비를 관리하는.
나는 돈 관리를 잘 못 한다. 꼼꼼한 성격도 아니다. 엑셀도 못 한다. 입출금 내역 정리는 더더욱. 내가 총무를 맡았다는 건 그 자리를 대체할 인물이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작년 총무에게 걱정을 토로하니 일 년에 몇 번 안 만나서 크게 할 일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도움 될만한 자료를 넘겨주었다. 곧이어 전년도에 남은 돈도 송금해 주겠다고 했다. "잠시만요!" 아직은 받을 준비가 안 됐다. 이걸 받으면 진짜 총무가 되는 건데. 아직은 거절할 여유가 있었다.
집에 와서 모바일로 통장을 만들었다. 계좌명은 내 이름이지만, 모임 이름은 학과 명으로. 그 통장으로 남은 돈을 받았다. 인계받은 130만 원에, 미리 스트레스라는 이자까지 스스로 더했다.
이번에는 임원진들 회비를 받아야 했다. 몇 명 되지 않지만, 10만 원씩이면 금액이 달라진다. 누가 입금했는지 체크해야 했다. 문제는 내가 엑셀을 못 한다는 거. 친절한 AI에게 받은 자료를 복사해서 엑셀파일에 붙여 넣었다. 약간의 꼼수를 부렸지만, 이런 생각을 해낸 내가 기특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마감 이후에 입금하는 이가 있다. 추가하고 붙이기를 반복하며, 이제 좀 그만 수정했으면 하고 있다.
신입생 환영회 준비도 했다. 물품 사고, 모은 영수증을 A4 용지에 붙였다. 지출내역도 정리해야 해서 또 표를 만들었다. 엑셀을 못하지만, 할 수 있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
학과에서 사용하는 기물도 받아왔다. 잃어버리면 곤란하니까 현장에서 사진 찍고, 집에 와서 또 한 번 찍었다. 누가 “그거 어디 갔어요?”라고 물으면, 사진으로 대답해야 하니까.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두어 시간은 금방이다. 누군가는 5분, 10분이면 끝낼 일일 수도. 총무를 맡고 나서 돈이라는 숫자에 신경을 쓰게 됐다. 통장 잔액을 자주 확인한다. 거래내역을 자주 본다. 직함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비즈니스 모임에서도 역할을 맡았다. 홍보담당이다. 블로그, 인스타그램, 스레드에 팀 소식을 올리는 역할을 맡았다. SNS를 잘하지 않는다. 내 계정도 꾸준히 관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대표 계정을 맡게 됐다. 이쯤 되면 내가 가진 능력보다 맡길 사람이 없었던 쪽에 무게가 실린다.
원래는 매주 정규회의 자료 위주로만 올리면 됐다. 그런데 이번에 대대적으로 변화를 준다 했다. 스레드도 해야 하고, 팀별로 챌린지도 해야 한다고. 참여율에 따라 워크숍 비용이 지원된다니 안 할 수가 없다.
회의 공지도 올려야 하고, 기타 소식도 올려야 한다. 영상까지는 못 찍어도 글은 쓸 수 있다. 적어도 글은 내가 맡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회의 때마다 오늘의 키워드, 일정한 줄, 사진 한 장 찾는데 집중하려 한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 중 난관에 부딪혀 정지상태인 일이 있다. 그래서 이 모임을 계속하는 게 맞나 싶은 상황에 역할을 맡아버렸다. 그게 나를 붙잡고 있다. 일단, 뭐든 맡았으니까 해보려 한다. 문제는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학창 시절에는 어떤 감투도 안 쓰고 살았다.
그런데 40대 중반에 총무와 홍보담당이란 타이틀을 동시에 안게 됐다. 반장은 못 했지만, 통장은 만들었다. 엑셀은 못 하지만, 표는 늘었다.
확실한 건 잘해서 맡은 게 아니란 거다. 그렇지만 그에 맞는 일을 배우며 어찌 됐든 해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