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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믈리연 Sep 22. 2022

2022년 8월 19일

내 인생 또 하나의 역사를 쓴 날


살면서 기억하고 싶은 날이 있다. 아니, 잊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2022년 8월 19일. 이 날이 그렇다.


오전 7시 30분. 방학이라 느지막이 일어나는 평소와 달리 부산스레 움직였다.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불과 한 달 전에 서울을 다녀왔지만 다른 목적이었다.

다른 이의 비즈니스에 참여하기 위해 올라갔지만 이번에는 오롯이 나를 위해 올라갔다. 

10년 만이었다. 이상했다. 설레면서도 담담했다. 

수없이 머릿속에서 그린 그림에 색감을 입히러 가는 날임에도 발걸음은 의외로 차분했다.


작년 가을, 공저로 출간 계약을 한 적이 있긴 했지만 아는 것이 없다는 핑계로 물러나 있었다. 

서류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조사 하나에도 의미가 달라지는 계약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판단할 만큼 문해력이 없었다. 

일 년 후, 이번 계약서는 오롯이 혼자 봐야 했다. 알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출판계는 어떤 식으로 계약을 하는지, 어떤 항목을 유심히 봐야 하는지, 더 알아볼 것은 없는지, 혹여 나한테 불리한 내용은 없는지, 그걸 식별할 능력이 부족하진 않을지 등의 걱정이 있었다.


그런 나를 예상한 듯 친구이자, 앞날의 동반자이자, 구세주인 영은이가 동행해 주었다. 유선상으로 어떤 부분을 체크해야 하는지 알려주긴 했지만,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듣는 능력이 뛰어난 나는 다 이해하지 못했었다.

영은이가 함께 한다니 든든했다. 아직도 모르는 것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보호자가 필요한 어른이었다.


수서역에 내려 서초로 향했다. 올해 들어 서울을 오면, 서초에 갈 일이 많았다.

행사 참여, 아이들 모임, 체험 등에 이어 개인적인 일 마저 서초에 볼일이 있음을 알고 나니, 오늘을 위해 미리 익숙해지려 그랬던 건가 하는 인과관계도 없는 합리화를 했다.


건물을 못 찾고 있는 우리를 직원이 데리러 나왔다. 깔끔한 외모에 다정한 표준말을 쓰는 직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근무 중인 직원들 사이를 지나, 대표님을 만나러 들어갔다. 머릿속에 그린 이미지 그대로였다. 중절모만 쓰신다면 전형적인 시인 분위기가 느껴질법한 분이셨다. 한 참 나이가 아래일 우리들에게 존칭을 쓰셨다. 먼저, 대표님이 쓰신 소설을 한 권씩 주셨다. 만년필로 적어내려가는 사인을 보며, 언제쯤이면 저 정도의 아우라가 나올 수 있을까 동경하듯 바라보았다. 곧이어 출간과 관련한 얘기가 오갔다. 판형, 흑백, 디자인, 홍보 등 일에 대한 대화가 오고 갔지만, 삼천포로 빠지는데 특기가 있는 나와 영은이의 대화 속에 대표님도 여러 번 빠져나갔다 들어왔다. 출간에만 목적을 둔 초보 작가의 책이 작은 출판사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야기, 종이 재질과 한 판이 몇 페이지로 구성되는지, 출판사의 중요성 등 그 누구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도 해주셨다.

식사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직원들을 먼저 보낸 후 함께 식사를 하러나갔다. 


사무실에서 보던 비즈니스적인 모습은 사무실 문을 나서는 순간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길을 몰라 헤매고 있던 식당이 이 동네 맛집이었을 줄이야. 돌솥비빔밥이 맛있다고 하셨다. 깻잎을 찢어 밥 숟가락위에 얹어먹으면 기가 막힌다 하셨다. 영은이가 떼어주는 깻잎을 올려먹으며, 대화의 반찬과 함께 먹었다. 조금 전에 우리를 데리러 나온 직원은 둘째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두 번째 사담의 꽃이 피었다.


자리를 옮겨 카페에서 세 번째 사담의 꽃이 피었는데, 어떻게 글을 쓰시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친구와 지인의 이야기까지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서울 사람은 깍쟁이다, 선을 넘으면 안된다는 선입견을 완전히 사라지게 해주었다. 별거 아닌 대화일 수도 있지만, 짧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친분을 쌓은듯했다. 그날 그렇게, 계약은 성공적으로 성사되었다.


8월 19일 오전 7시 반과 오후 1시 반 사이, 나의 인생은 몇 계단 위로 풀쩍 뛰어넘었다.

인생은 그래서 재미있나 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실감한 3시간이었다.


대표님이 해준 말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출간계에 존재하는 3T이다.

3T는 타이틀, 타깃, 타이밍이다.


타이밍. 친구 분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스토리를 들으며, 내 책도 그런 타이밍을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표님으로 부터 이메일을 받기 며칠 전부터 꿈에 유명 인사들이 자주 나왔다.

이재용 회장, 오은영 박사 외에도 몇 분이 있는데 그새 흐릿해졌다.

마치 원래 알고 있던 지인처럼 가까운 사이였고,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누던 꿈이었는데

깨어난 후에도 한참 그 속에 있었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작디작은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긴장을 끈을 놓은 순간, 대표님의 이메일을 열었다.

사실 다른 곳과 구두계약을 하긴 했지만, 개운하지 않아 계속 찝찝함이 남아있던 찰나였다.

경로 변경이 쉽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가는 쪽으로 가고 싶었기에,

죄송함을 전하고 여기로 옮기며 한 차례의 타이밍을 썼다.


이어 두 번째 타이밍을 기대한다는 것이 웃기지만, 그게 현실화되지 않으란 법도 없지 않을까.

뜻하지 않던 출판사와 손을 잡은 것에 이어, 두 번째 타이밍도 왔으면 내심 크게 기대해 본다.

2022년 8월 19일. 인생에서 또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어떤 색이 덫 칠해질지 모르겠지만, 미지 한 내일을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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