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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Jan 27. 2023

아버지의 족보 강의


얘야 시간 있냐?


아버지가 방으로 쉬러 들어가는 나를 붙잡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의 손에 족보가 들려 있었다.


너도 족보를 알아둬야 할 테니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두거라.


나는 각오해야 했다. 퇴직 전 학교에 있었던 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최소 삼십 분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족보에 대한 강의는 최소 한 시간 이상이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듣지 않을 것인지 모처럼 이야기를 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꼬박 한 시간 이상을 앉아 들어줄 것인지를 말이었다.


내 눈에 족보를 쥔 아버지의 늙은 손이 들어왔다. 이제 팔십이 다 되어가는 주름 가득한 손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외출을 하지 않아 얼굴은 물론 손마저도 새하얗다. 나는 아버지에게 나의 한 시간을 기꺼이 선물하기로 했다. 평소 엄마 말고는 대화 상대가 없던 아버지가 오래간만에 말씀이란 걸 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는 스스로가 느껴졌다. 어릴 적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가 여러 번 혼이 났던 경험에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드는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는 게 힘이 들었다. 혹시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얼굴이라도 맞은 적이 있는 걸까? 어릴 적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이야기 중간 내가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이면 엄하게 혼내곤 다.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은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급제를 했다. 이즈음 목은 이색 역시 원나라 문과에 급제를 했는데 이런 인연으로 우리 집안과 한산 이 씨 집안과 가깝게 지냈다. 그렇게 여말 선초를 화려하게 보냈던 우리 집안은 기묘사화에 화를 입어 지금의 시골로 도피했다.'


아버지에게서 그전에도 여러 번 들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 들은 것처럼 들어드렸다. 어차피 지금 보면 추석에나 다시 찾아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버지 얘기를 중간에 끊으면 더 길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군소리 없이 묵묵히 듣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이번에 들으면 서른 번도 넘을 것 같은 이야기를 아버지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했다. 한 가지 예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유난히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걸 힘들어했다는 점이었다.


내가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마스크를 쓰고 다시 나오셨다. 아직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은 아버지는 내 기침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시간은 어느새 4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터진 말문을 좀처럼 멈추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코로나 감염이 무서워 마스크를 쓸지언정 이야기를 중단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디스크 증상이 있던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던 나는 무심코 시계를 쳐다봤다.


왜 무슨 일이 있냐?


그 모습에 신경 쓰였는지 아버지가 물었다.


예, 밖에 나갈 일이 있어서요.
몇 시냐?
두 시요. 근데 이제부터 준비해서 나가야 해서요.
그럼 오 분만 더 얘기하고 끝내마.


옛날 같으면 말 다 고 나가라고 했을 텐데 아버지도 많이 약해지긴 했다. 갑자기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 사실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나이 오십을 넘긴 아들은 오늘도 그렇게 백 점짜리 효자가 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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