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길 포기하면 편안해지지.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

by 옥상평상

아이들과 오늘도 도서관에 끌려온(?) 나는 구독하는 작가님들의 브런치 글을 모두 읽은 후 끌리는 제목의 책 하나를 손에 집었다.


'좋은 사람이길 포기하면 편안해지지.'


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책이었다. 소노 아야코라는 1931년 생 작가의 얇은 책은 대략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노력을 멈추라는 이야기를 작가의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짜임새 있는 구성은 아니었지만 이제 백 살이 다 되어가는 노작가의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과 여유가 돋보이는 책이었다.


그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성악설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었다. 어떤 과학적 연구나 철학적 사고를 근거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성악설을 취하면 악인을 만났을 때도 당연할 일이니 그다지 당황하지 않게 되고 혹시라도 선인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행복이 커질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내가 좋아하는 스토아학파의 일상에서의 행복을 찾기 위한 방법 중 자발적으로 고통 또는 가난을 상상하는 기법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반가웠다. 평소 행복의 기준점을 낮춰 놓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일상에서 보다 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논리적 근거에서 두 생각은 공통점이 존재했다.


좋은 사람이길 포기한다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 논리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나에 대한 평가의 기준치를 낮춰 놓으면 우리 역시 자연스럽게 그 타인에 대한 기대를 낮출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쩌다 그 타인이 우리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 하더라우리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응 넌 그렇게 생각했을 줄 알았어.'정도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와 반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눈치를 보고 무리해서 잘하려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어쩌다 싫은 소리라도 듣게 된다면 쉽사리 멘붕에 빠질지도 모를 것이다.


'내가 이런 소리나 들으려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잘한 걸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저 사람은 내게 이러는 거지?'


별별 생각을 다하며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암약하고 있는 빌런들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귀신같이 알아본다. 그들을 발견한 빌런들은 옆에 붙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노력을 이용하여 그들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철저하게 단물을 빨아먹는다. 그리고는 다시 또 다른 먹이를 찾아 떠난다. 빌런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


작가 소노 아야코가 말하는 좋은 사람이길 포기하라는 이야기는 나쁜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노력을 자제하거나 거두라는 이야기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93세가 되는 작가는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스스로의 결함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을 적잖이 곤혹스럽게 한다. 적당하게 대지를 오염시키고, 숲을 황폐화시키고, 물과 공기를 더럽히고, 적당하게 타인이 누리는 편리함이나 행복의 몫을 완력으로 빼앗는다. 그러한 양심의 가책을 어느 정도 줄이고자 노력할 때 비로소 인간은 조금이나마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을 취하게 된다.

나는 평생 적당하게 나쁜 일을 해왔기에, 적당하게 좋은 일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살아가고 싶다.


또한, 다른 글에서는 소위 스스로의 결함 또는 악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함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적당한 악'과의 공생

'적당한 악'과 공생하며 살아간다는 인식은 내게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만약 내 의식에 '적당한 악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나는 바로 인간성을 잃는다. 자신이 대단한 인도주의자라 생각한다면 그 순간부터 누구든지 악취를 뿜어내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적당한 악을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자칭 휴머니스트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향유하는 모든 편리함을 똑같이 누리면서도 발전소의 건설에는 반대하며, 언론에 발언하여 돈을 벌면서도 종이의 원료인 숲을 베는 일에는 반대한다.


스스로의 결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결단이다. 오히려 스스로 결함이 없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혹시라도 그 결함을 타인에게 들킬까 봐 타인에게 잘 보이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스스로가 완전무결하다고 억지로 믿고는 있지만 그것에 모순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채고 있기에 그는 더더욱 세상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불행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어차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단순히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을 해치게 된다. 우리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해치고 집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숲을 파괴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상당한 양의 쓰레기를 만들어 자연에 버린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자연에 빚을 지고 있는 존재로 일종의 해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에게 겸손해야 하며 조금 더 자연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지구에 해악이며 부족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구태여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을 거두고, 서로에게 보다 나은 스스로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모두의 행복에 가까워지는 삶의 태도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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