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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Feb 26. 2023

합정역 횡단보도 앞에서



코끝을 시리게 하는 2월의 찬 바람이 이대로 봄을 맞는 것은 도저히 용납 못하겠다는 듯  발악을 하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어둠이 무겁게 내리고 있는 합정역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털썩!



로 누군가 커다란 짐 여러 개를 동시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난히 큰 소리에 놀라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쳐다보았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허름한 행색의 노인이 낡은 여행용 가방들을 내려놓은 소리였다. 실밥이 터진 두툼한 네 개의 가방이 그의 발 앞에 짐처럼 놓여 있었다. 양손에 나누어 들고 왔을 터였다. 그는 손가락이 아팠던주름 가득한 여러 번 접었다 폈다. 어깨도 아팠던지 어깨를 만지며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 모습에서 그의 고단함이 스란히 느껴졌다.


가방 지퍼 사이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녹슨 철제 옷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저 네 개의 가방은 그의 전 재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다. 어쩌면 그는 지금 새로 살 곳으로 이사를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그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 네 개의 가방이 그의 전재산이 된 걸까?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을까?



하릴없는 궁금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순간 파란색 신호등에 불이 들어왔다. 6차선 대로 양 옆으로 늘어선 사람들이 마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전투병들처럼 서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었다면 서로를 때리거나 죽이지는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신호등의 막대 표시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더욱 속도를 붙이며 서로를 향해 달렸다. 나 역시 영문도 모른 체 그런 그들을 좇아 걸음을 재촉했다.



문득 아까의 노인이 떠올랐다.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개나   든 그는 잘 건너오고 있을까?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슬로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힘겹게 걸어오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무거운  어깨에 낡은 가방이 두 개씩 려 있었다. 그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내 다리는 그와 무관하게 여전히 앞을 향해 내달릴 뿐이었다.  신호가 바뀌기 전에 큰 횡단보도와 작은 횡단보도 모두 통과해야 했다.



결국 나는 100미터 결승을 통과하듯 횡단보도 두 개를 시간 내에 통과해 냈다. 아직 파란색 신호는 두 칸이나 남아있었다. 뜻 모를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그의 모습을 찾았다. 그는 아직 첫 번째 횡단보도조차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신호가 바뀌고 말았다.



빠앙!!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그가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어정쩡하게 서 있자 트럭 한 대가 사납게 경적을 울렸다. 동물의 포효 같은 경적소리에  쫓긴 그가 허겁지겁 첫 번째 횡단보도를 통과했다.  횡단보도와 작은 횡단보도 사이의 쉼터 같은 안전지대에 선 그가 비로소 거친 숨을 돌렸다. 어깨가 아픈지 어깨를 주물렀다. 그가 느끼고 있을  고통과 고단함이 내게도 전해졌다. 네 개의 낡은 가방은 여전히 그의 발 앞에 처럼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어쩌면 그가 평생을  왔을 무거움일지도 몰랐다.


작은 횡단보도그와 나 사이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에 두고 온 건 나였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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