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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Aug 29. 2024

간단히 정리하려 했지만 길어지고만 말레이시아 역사

말레이시아 국립 박물관의 전시물을 중심으로

https://maps.app.goo.gl/U6G8mabPgKqNFp3TA




말레이시아 국립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오는 토요일 말레이시아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는 의미의  말레이시아 국기가 지하철 곳곳에 걸려 있었다.

말레이시아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Malaysia)은 쿠알라룸푸르에 위치한 말레이시아의 주요 역사 및 문화 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은 말레이시아의 풍부한 역사, 문화유산, 전통 등을 전시하며, 다양한 유물과 전시물을 통해 말레이시아의 발전사를 소개합니다.

주요 전시관에는 선사시대, 왕조 시대, 식민지 시대, 독립 이후의 현대 말레이시아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건물 자체도 말레이시아의 전통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1963년에 개관했으며, 말레이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관광객과 현지인들에게 중요한 방문지 중 하나입니다.
말레이시아 전통 가옥의 모양을 한 국립박물관의 전경


말레이시아의 역사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여러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각 시대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선사시대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섬은 원래 하나의 대륙이었다. 그것이 후대에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네 개의 섬으로 나뉘게 된다.



장애가 있음에도 당시 평균 수명인 20세의 두 배 이상을 살다가 죽은 남자의 유골인 페넥맨이다. 부장품으로 미루어 제사장이나 귀족으로 추정된다.

2. 고대 시대 (기원전 1세기 - 15세기)


원래 하나의 대륙이었던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섬 등은 바다에 의해 섬으로 분리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말레이시아 지역은 인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 무역로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힌두문화와 불교문화가 융합된 형태의 부조로 양 옆으로는 인도의 고대문자인 산스크리트어가 적혀있다.

작은 형태의 불상으로 인도의 통일 왕조인 굽타의 불교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계절풍인 몬순의 영향으로 말레이시아 지역은 일찍이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이 만나는 교차점의 역할을 하였다. 일 년의 반은 북풍이 불고 일 년의 반은 남풍이 불어 이를 이용한 항행 기술이 발달하였다.


카다라말라 유적지 등에서 발굴된 유물은 3세기부터 7세기까지 존재했던 랑카수카, 스리위자야와 같은 초기 왕국과 관련이 있다.

말레이 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부장가 문화의 불교 사원의 모형이다. 부장가란 뜻은 뱀을 뜻하는 인도어로 요가의 자세 중 뱀의 형상을 본뜬 부장가 자세가 있다. 힌두교와 불교가 융합된 이 문명은 후대의 앙코르 와트 문명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지역을 흐르는 강의 모습이 뱀이 땅 위를 기어가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 부장가 문화이다.


3. 중세 시대 (15세기 - 18세기)


말라카(1400년대) 시대 15세기 초, 파라메스와라가 세운 말라카는 겨우 110년 동안 유지된 국가였지만 말레이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라카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주요 무역항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이슬람을 전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라카의 설립자는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라는 지금은 인도네시아인 수마트라 출신의 왕자로, 그가 다스리던 스리위자야에말라카로 도망쳐 온 인물이다.

파라메스와라는 말라카 강 하구의 전략적 위치와 자연적 장벽인 숲과 언덕이 방어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이곳에 새로운 정착지를 세웠다. 그 후 말라카는 동남아시아에서 중요한 항구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말라카의 설립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전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파라메스와라가 강변의 나무 아래 앉아 쉬고 있을 때, 그의 사냥개가 사슴과 비슷한 동물을 쫓아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때 그것을 쫒던 사냥개가 강물에 익사하게 되었고 이를 보고 놀란 파라메스와라는 이곳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파라메스와라는 이 사건을 긍정적인 징조로 해석하며, 그 장소에 도시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가 앉아 있던 나무의 이름이 '말라카(Malacca)'였기 때문에, 도시의 이름을 '말라카'로 지었다.



말라카의 이름을 딴 말라카 해협은 지금도 활발한 해상 교통의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말라카 귀족들이 사용하던 칼들로 힌두문화권일 때는 손잡이에 화려한 문양을 조각해 넣었으나 말라카 국왕이 특정한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단순하고 심플한 모양으로 바뀌었다.

말라카에서 사용하던 선박의 모습


 말라카 국왕이 이슬람 사신들을 만나 개종을 약속하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전설이 있다. 말라카 국왕이 잠을 자고 일어나니 이슬람 경전인 꾸란을 몽땅 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위 장면에서 왕은 사신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고 있다.


1400년부터 1511년까지 약 110년 간 영화를 누리던 말라카는 포르투갈에 의해 멸망한다. 그렇게 말레이 반도에는 유럽 식민 지배가 시작되었고, 1641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포르투갈로부터 말라카를 빼앗는다.





포르투갈 군대가 바스코 다가마가 발견한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나 마다가스카르 섬, 인도양을 지나 말라카 해협까지 온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포르투갈 선박에는 화포가 배치되어 있어 말라카 해군을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말았다. 당시 포르투갈 선박이 운용했던 겔리선은 순풍뿐만 아니라 삼각돛으로 역풍 또한 이용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장점이 장거리 항행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다만, 포르투갈 선박의 단점은 계속 선내로 물이 차오른다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장점이 많았던 까닭에 당시 포르투갈을 비롯한 스페인, 영국까지 모두 이 갤리선을 채용하였다.

아포모사 요새는 포르투갈 군대가 구축한 요새인데 이 요새 안으로 성당과 정부청사, 포르투갈 상인들이 모여 살았다. 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포르투갈로부터 말라카를 빼앗은 후 다시 한번 리모델링을 하여 사용하였으나, 결국 영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성벽은 거의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포르투갈에 의하여 점령당하자 말라카의 군대는 계속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네덜란드의 힘을 빌려 탈환하는 데 성공하는 듯하였으나, 다시 네덜란드에게 빼앗기고 말게 된다.

아포모사 요새의 남아 있는 유적과 같은 크기의 모형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4. 근대 시대 (18세기 - 19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프랑스와 본국과의 전쟁으로 병력을 철수하자 페낭에 있던 영국은 말레이시아 지역을 점차적으로 점령해 나갔다. 페낭(1786), 싱가포르(1819), 말라카(1824) 등이 영국령 말레이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19세기말, 영국은 말레이 반도의 여러 술탄국들을 통합해 말레이 연방을 만들었다.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발레이반도에서 생산된 주석을 사들여 본국으로 보내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주석광산의 주인은 말레이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중국의 각지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이렇게 모인 중국인들이 각 지역별로 다툼을 벌이자 이들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말레이 지배층이 영국에게 통치권을 양도하는 조약을 맺고 만다.


말레이반도의 지배층들이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통치권 이양에 관한 조약을 맺는 장면이다. 마치 우리의 강화도 조약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통치권을 얻게 된 영국은 말레이 반도에서 주석뿐만 아니라 고무를 채취해 수출하게 되는데 이때 들여온 값싼 노동력이 바로 인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있게 될 민족 갈등의 시발점이 되고 만다.


노동력에만 의존했던 주석 광산의 작업은 후에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에 의해 기계회 되었다.



5. 현대 시대 (20세기 - 현재)


1941년 일본군이 영국군을 이기고 말레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일본의 지배가 시작된다. 이때 일본군은 독일의 게슈타포와 같은 비밀경찰을 운용하며 많은 말레이 국민들을 고문하고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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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말레이 반도로 진군할 때 사용하였던 자전거의 모형이다. 일본군은 그 험난한 정글을 달랑 이 자전거를 타고 행군을 한 것이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침략했던 것처럼 초고속으로 진군을 해  달도 안 되는 시간에 말레이 반도를 점령하고 말았다.

일본의 비밀경찰이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말레이 사람들을 겁박한 모습과 일본의 자전거 부대가 정글을 뚫고 도시로 진격해 오는 장면이다.


하지만 곧 일본은 패망하였고 다시 영국의 지배가 시작된다. 말레이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고,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마침내 1957년 8월 31일, 말레이시아 연방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963년에는 사라왁, 사바, 싱가포르와 연합해 말레이시아가 되었으나, 1965년 싱가포르는 중국인에 대한 차별을 이유로 스스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말레이 국민 의회가 진행되는 모습을 담은 드라마의 한 장면이 박물관 한편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국기의 뜻은 초승달은 이슬람을 상징하며 흰색과 빨간색 줄무늬는 연방을 이룬 국가의 수를 의미한다. 독립 당시인 1957년에는 11개였으나, 1963년 사라왁, 시바, 싱가포르가 가입하면서 14개로 늘었다. 그 후, 싱가포르가 분리되면서 13개가 되어야 했으나 지금도 14개를 그대로 쓴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 쿠알라룸푸르에서 이토록 많은 국기가 보였던 것은 며칠 후에 있을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의 갈등을 봉합하고 나아가  통합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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