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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Mar 16. 2021

만년필(萬年筆)을 쓰는 이유

끓임 없는  관심과 보살핌을 요구하는 오랜 친구~~

    


   메모할 일이 있어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잉크가 말라 쓸 수가 없었다. 만년필은 잉크가 닳는 것을 일일이 체크할 수없고, 뚜껑 닫는 것을 깜박하거나 좀 쓰지 않고 두면 잉크가 잘 마른다. 바쁠 때는 속상할 수 있다. 그래서 볼펜이 발명됐는지도 모른다. 성격 급하고 손아귀 힘이 센, 나 같은 사람이 쓰기에는 볼펜이나 수성펜이 훨씬 부드럽게 잘 나간다. 만년필은 너무 눌러쓰게 되면 펜촉도 잘 망가지기 때문이다.

글을 연속적으로 써야 하는 사람들에겐 더 불편할 수도 있다. 하기사 요새는 작가도 만년필을 쓰기보단 컴퓨터로 쓴다고 들었고, 나 역시 지금 컴퓨터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작가의 상징과도 같았던 만년필이 예전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쓰이는 역할에 불과한 필기도구가 된 것이다.


   요즘은 만년필을 많이 선호하지 않는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불편하기도 하고 너무 오래 쓰는 것보단 새롭게 자주 바꿀 수 있는 좋은 필기류가 많기 때문 일 것이다. 기능 다양하고 멋진 디자인의 편리한 문구 도구를 선택할 수 있는 요즘에 굳이 한 가지를 고집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나는 만년필을 좋아한다.

만년필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고, 명품 만년필이나 여러 종류의 만년필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만년필에겐, 무생물이지만 생물처럼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다.

나름대로 표현하자면 어떤 애정을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만년필이 내게 손짓을 하는지 내가 만년필을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다른 필기구 하고는 틀린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요즘처럼 컴퓨터를 필기류 이상, 다방면으로 사용하는 때도 자주 만년필을 만지게 되는 것 같다.


   상급학교로 진학하거나 졸업할 때면 만년필 선물을 받곤 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지우기 쉽고 부러지기 쉬웠던 연필과 달리, 흔적의 책임을 져야 하는 만년필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고 가야 하는 의식의 상징과도 같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 등급 올라가는 학업, 인생의 무게가 다른 것을 암시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론, 지금이야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오래 써야 하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이름이 만년필(萬年筆)이랴...


   그냥 만년필이 좋지만, 만년필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우선 잉크를 항상 주입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잉크가 남았는지 수시로 돌려 보아 확인도 하고... 물론 잉크 넣은 후에도 휴지로 펜촉을 닦다 보니 손가락 끝엔 항상 잉크 자국이 조금씩은 남는 것 같다. 참고로 이 친구는 흔적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 카트리지 잉크를 많이 쓰지만, 병 잉크와는 맛의 차이가 있음을 만년필을 쓰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펜촉도 자주 봐야 한다. 막히거나 휘지는 않는지, 잘 쓰기 위해선 가끔 세척도 해줘야 한다. 관심과 정성을 쏟는 만큼 오래 사용하고 보관도 잘되기 때문이다.

만년필은 쓰는 사람이 쓰게 만들어야만 잘 쓸 수 있다. 마치 최신 성능에 손가락 하나 움직임으로도 잘 나가는 최신 자동차들 속에서, 손으로 기어를 넣어야 부릉거리는 관심을 요구하는 수동변속 자동차의 색다른 맛처럼... 자동에 익숙한 내게 수동의 의미를 잊지 않게 해 준다


   만년필을 쓰면 잉크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나는 크로스 잉크를 주로 쓰는데 잉크를 새로 넣을 때나 글을 쓸 때면, 약간은 먹 냄새 비슷하기도 하고 흙냄새 비슷하기도 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러면 묘한 기분이 든다. 원하던 학교에 갈 수 있다면 만년필을 사주겠다고 하시던 아버지 얘기도 생각나고... 그 짧은 시간에 요즘 느낄 수 없는 오래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론 만년필은 커리어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명품이 판을 치는 세상에, 만년필도 당연히 명품이 있다. 오래전 로마 스페인 광장 앞 명품거리에서 아이쇼핑을 하던 중, 몽 00 매장 안에 들어가 아주 고가의 만년필을 써본 적이 있다. 팔리니까 전시해 놓고 필기감을 느껴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멋진 명품 만년필은 없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몇 자루의 만년필도 속이 알찬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나처럼 싫증을 쉽게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좋은 벗과도 같다. 예전 선비들에게 문방사우가 있었듯, 내겐 오래된 나의 만년필이 있다. 필요에 의해 쓰는 문구류의 일종에 불과하고, 선조들이 쓰던 붓에 비하기야 못하겠지만, 나름대로의 격식과 철학이 있는 사람만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년필이, 자신만의 커리어를 당당하게 보여주는 멋진 친구가 될 수 있다. 만년필을 계속 쓰는 사람은 며칠에 한 번씩은 속을 열어 봐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전 한 친구가 자신은 태엽 감는 손목시계가 좋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매일 태엽을 감으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또 살아 있는 것을 시계가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고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현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무력감을, 자신이 감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시계를 통해서라도 누르고 싶어서였을까... 하루에 한 번씩 스스로 시간을 만들어 가는 존재감의 희열까지 느낄 수 있으면서...


   만년필을 좋아하는 이유가 태엽 감는 시계를 좋아하는 이유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해 너무도 잘 준비된 하루하루를(적어도 살아가는 편리성 부분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 몸과 마음에, 살짝 스쳐가는 바람이라도 느끼게 하고, 살아가고 살아왔고 살아갈 존재지만 자라지 않으면 썩어버릴 수도 있는 자연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란 틀에 맞춰 짜인 작품이 아니라, 움직이고 상처 받고 아물어지지만 지워도 흔적 남는 삶이란 것을 깨닫게 하는 작은 매체 중의 하나... 그게 만년필일지도 모른다.

늘 나의 관심과 보살핌을 요구하고 만년 동안이나 친구 하겠다는 무생물 친구 만년필.

난 아주 오랜 후에도 지금의 만년필을 쓰고 있을 것이다.

 


                             ( 오랜 활동 후에 지금은 잘 작동하지 않아 쉬고 있는 나의 만년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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