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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Feb 18. 2022

스마트폰으로 쓴 베트남 다낭, 호이안 기행기 1

출발, 후에, 다낭


2016.04.24~04.27까지 베트남의 다낭, 후에, 호이안 여행한 것을 스마트폰(갤럭시 노트1)으로 기록한 여행 수필입니다.





2016.4.24

영문도 모른 채 꼬리 흔들며 같이 산책하자는 보리와 승리를 떼어 두고 담담하게 나왔다. 며칠이긴 해도 바쁜 아이들에게 강아지들까지 맡겨서 미안했다. 그래도 화창한 날씨에 맘이 설렌다. 역까지 걸어가는 길 옆의 아파트 주변 철쭉과 영산홍은 온 거리를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계절의 여왕이 나오실 차비를 하는 듯  신록이 삐죽거린다. 공항버스를 기다리며 앞에 있는 **에서 아이스라테 한잔 시켰다. 여행분위기를 내 보련다. 방랑객 분위기를 내보련다. 이번엔 정말 푹 쉬며 구경하고 맛있는 과일 실컷 먹고 책에 대한 구상이나 하려고 한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언제나 나의 로망이었다. 이때여행 중에 이런 결심을 했다 생각하니, 실행하지 못하고 생각만으로 보낸 시간이 반성된다. 스마트폰 기행기를 쓰면서 꿈을 실행에 옮기련다. 2022.01.27)


대한항공의 자매? 항공, 진에어 8시 50분발 다낭행은 활주로 부족을 이유로 이륙이 늦어진다. 간단한 기내식에  검은깨 초밥 두 개와 햄 한 조각 마카로니가 들어있다. 검은깨 초밥 한 개 먹었다. KAL이나 아시아나 기내식이 얼마나 좋았는지 비교된다. 별 탈 없어 보여도 회사는 위기상황이다. 사실 회사란 것은 항상 위기 상황에 놓여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얘기는 항상 같다. 배짱도 여유도 없이 그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전력 질주해야만 한다는 거다. 여행을 하면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돌아가서는 많이 변할 것 같은데, 사실 그렇게 되기도 싶진 않다. 그래도 그래 보련다.


항상 결심이 앞서는 나 같은 인간은 힘들게 사는 편에 속한다. 어차피 월등하게 잘하지도 못할 거면서 대충 넘어가진 못한다. 적당히 흐름에 맞추어 살면 얼마나 편할까마는 그게 잘 안된다. 타고난 운명이랄까. 그래도 여행이라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여유와 배짱이 제법 생긴 것 같다.


12시 41분 도착했으나 입국심사대에서 엄청난 사람들과 함께 대기 중이다. 다낭의 혼잡스러운 입국절차는 못 잊을 것 같다. 줄도 없고 알아서 하라는 자유분방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 시간 더 걸려서 겨우 나왔다. 생각하면 두 번 오고 싶지 않을 정도의 혼돈이었다.

  

오전 256분, 씻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다낭 노보텔전원이 맞은편 화장대에 있는 것 빼곤 깨끗한 호텔이다. 안 붓던 다리도 붓고 많이 피곤하다. 6시에 일어나야 할 텐데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행복하게 쉬자.


2016.4.26

간밤에 이런저런 꿈으로 뒤척이다 이른 아침에 4층 식당으로 갔다. 식당이 깨끗하고 한적하다. 창밖으로 한강(瀚江)이 보인다. 다낭을 가로지르는 강인데, 서울의 한강(漢江)과 이름은 같으나 의미는 다른 것 같다. 다낭은 호찌민과 다른 개발도시, 계획도시로 조성된 곳이라 잘 정돈돼 보인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서 수박과 패션후르츠를 맘껏 먹으면서 여유를 즐겼다. 여유 있는 조식을 한 후 호텔방에서 한강이 보이는 정경을 잠시 스케치하고 출발 전까지 쉰다. 여행은 어디든 좋은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좋다. 특히 동남아 여행의 장점은 열대과일을 실컷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물가가 비싸지 않고 언제나 신선한 과일이 풍부하다. 여기는 베트남, 사방에서 휘날리는 붉은 깃발처럼 "오늘"이라는 깃발을 드높이 휘날리며 살아보자.


오늘 일정은 왕복 다섯 시간 걸리는 우리의 경주 같은 곳 "후에"를 가는데, 거리가 멀어서라기보다 천천히 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동안 동남아 여행기는 많이 쓰지 못했다. 오래된 역사를 좋아하는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주로 유럽 등에 많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동남아는 쉽게 다녀올 수 있었고 비교적 덜 낯설기 때문이었던 듯싶다. 베트남에 대해서야 월남전으로 기억되는 가까운 나라이고, 지금은 한류 열풍과 많은 한국 기업의 진출로 호감이 높고 한국의 눈부신 경제개발을 모방하여 베트남도 경제부흥에 열심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항상 웃고 있지만, 호전적이고 싸움을 잘하는 민족이라고 한다. 여행객도 특수관리대상이라는 우스개와 더불어, 평소에는 전혀 모르다가 공권력 집행할 때 사회주의 국가임을 느낀다고 한다. 당에서 하라는 이외에 다른 행동을 했을 경우에 말이다. 5호 감시제가 있어 주기적으로 신고해, 큰 범죄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반도(베트남. 태국. 캄보디아)중 가장 남쪽에 위치 한국의 2.6배 크기이며 끝에서 끝까지 잇는다 치면 4000km나 되는 긴 나라라고 한다. 도로 사정이 나빠 횡단하는데도 150시간 걸린단다. 베트남에서 부의 기준은 오토바이라고(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가이드의 개인 주관일 수도 있다)한다. 도시의 러시아워 때는 오토바이 물결로 엄청나게 막힌다. 물론 오토바이 발레파킹도 해준다. 교통위반 단속은 먼저 속도위반으로 보통 60km,  터널이 가장 빨리 달리는 곳인데 70km 속도측정기는 대부분 없고 감(感)과 기분으로 단속하고 헬멧 미사용 단속을 많이 한다고 한다.


이번 여행기를 쓰면서 베트남 역사에 대해서도 살짝 공부를 한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선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인도와 이슬람의 문화적 영향력이 큰데 비해 베트남은 유독 중국의 영향력이 커서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한자(유교)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국가이다.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베트남 북부 델타 지역과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인근에 있었던 락비 엣(Lạc Việt, 雒越, 낙월)이라는 민족이 세운 봉건적 공동체인 반랑 국(Văn Lang, 文郎, 문랑)은 기원전 2879년에 훙브엉(Hùng Vương, 雄王, 웅 왕)에 의해 건국되어 18명의 훙 브엉의 2621년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트남 학계에서는 반랑이 대체적으로 기원전 7세기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측한다(위키백과).


이후 한나라, 위진 남북조 시대, 당나라를 거친 중국의 지배 등을 받다가 939년에 응오꾸옌은 베트남인이 중심이 되는 왕조인 응오 왕조를 세웠다. 이때를 기점으로 베트남은 한나라 무제 유철 때부터 이어져 온 지배를 벗어나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위키백과). 여러 왕조를 거쳐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1802~1945)에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통일 왕조를 구축했으나, 1840년부터 서구에 잠식되어 1884년 마침내는 프랑스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베트남 현대사의 비극을 아름답게(?) 보여주었던  프랑스 영화 "인도 차이나"를 보면 프랑스 식민시대의 베트남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이후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독립전쟁을 기점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월남전까지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된다. 처음 식민지 령에서 자국의 독립을 위한 전쟁은 마치 6.25 전쟁처럼 이념의 차이에 의한 전쟁으로 북베트남은 공산화, 남베트남은 떠난 프랑스를 대신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민주주의 노선을 타게 된다. 미국의 대외정책 중 오늘날까지도 실패한 정책으로 기억되는 월남전의 종식으로 1975년 북베트남은 베트남을 통일하고 공식적으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출범하게 된다. 수천 년 남의 나라 역사를 어찌 짧은 글에다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침략과 방어와 탈환의 역사는 우리 역사와도 닮은 점이 많다고 여겨졌다.


"후에"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수도로 응우옌의 궁터가 남아있는 고대도시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돼 있다.  "후에"에는 여러 황릉과 사원이 있는데 우리는 카이딘 왕릉, 왕궁, 티엔무 사원을 방문할 예정이다.

https://whc.unesco.org/en/list/678/


카이딘 왕릉은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십 년에 걸쳐 축조된 왕릉으로 20세기 초 베트남 건축 예술을 대표하는 곳이며 고딕 양식이 혼재되어 만들어졌다. 입구에서 36계단을 올라 중앙에 이르면 공덕비와 무덤을 지키는 문무관, 기마, 코끼리상을 볼 수 있다. 벽과 제단이 도자기와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천장에 용 그림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위키백과). 


궁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가이드 설명으로는 역대 왕 중에 가장 치욕스러운 왕으로 여겨진 왕이라 한다. 난잡한 생활을 했고 살아서 한 일이라곤 본인의 무덤 사원을 세운 것밖에 없다고 한다. 왕의 키가 작아 신하를 모두 154센티 이하로 채웠다는 재밌는 일화도 있고 베트남 국민들에게도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긴 왕이다.


황궁 종묘에서 베트남 마지막 왕조 13명 왕 중에 3명은 종묘에서 제를 안 지낸다고 했다. "공이 없는 왕이라서 그런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라도 그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는 최소한의 예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공사는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후손들에게도 철저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티엔무 사원은 1601년 건립된 유서 깊은 절이지만, 주지스님이었던 틱꽝득 스님 때문에도 유명한 곳이다. 그는 분신으로 불교탄압에 항거한 소신공양을 했다. 남 베트남의 부패된 정치구조와 불교탄압에 항거하며 미국 대사관 앞에서 언론을 모아놓고 온몸에 기름을 부은 후 소신공양을 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 내가 죽어서 앞으로 쓰러지면 불교가 망할 것이고, 뒤로 넘어지면 불교가 흥할 것"이라며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타들어갔다고 하는데 뒤로 넘어져 불교가 흥하게 되었다고 한다.


분신 후 까맣게 탄 육신에도 그의 심장은 다 타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분신 후 월맹이 남으로 쳐들어 오게 되었고 부패정권에 대한 내분이 시작되었다. 나라와 민족을 구해보자 했던 분신 공양이 새로운 베트남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 셈이 된 것이다. 티엔무 사원에는 그가 분신할 당시에 타고 갔던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낡고 녹슨 자그마한 자동차는 한 인간의 신념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틱광득 스님의 분신 사진(나무 위키)


후에의 아름다운 정원을 돌아보며 일행 중 C가 말한다. "책과 자연은 보는 사람이 주인이다". 멋진 말이다.

역시, 나보다 더 낫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마음이 통하는 지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야 말로 행복한 여행이다.


가이드를 하려면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 철저한 공부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 문화관광해설사가 국사 공부를 하는 것 같겠지만, 베트남 가이드 역시 우리나라 역사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해가고 있는 중이다.


열강의 근대 식민지 침략의 역사를 얘기하고 있다. 좁은 유럽 자국에는 없던, 많은 자원을 보유한 아시아는 당시 원재료 확보지인 동시에, 산업재로 역수출한 판매처가 되어 열강들의 좋은 공격지 였다. 열강들은 앞다투어 자원과 인력이 풍부한 아시아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침입을 시작했다. 일본 역시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세계 2차 대전을 발발시키지 않았던가. 식민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노력하던 중에 합리성, 여권(女權) 보장, 노동자의 권익보호 등을 앞세워 공산주의 사상이 파고들었다. 당시 구 소련에서도 이러한 모토로 세계 제1, 2차 대전 전후로 식민지의 독립을 진행시키고 공산주의를 넓혀 갔다.


가이드의 설명은 새롭고 재밌는 얘기로 이어진다. 베트남 방문 때마다 시장에 들르게 되는데 유독 꽃을 많이 팔고 사는 광경을 보곤 가난한 나라에서도 삶의 여유를 즐기고 산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오늘 그 이유를 듣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꽃을 많이 꽂는 이유는 꽃은 공산당원만 꽃을 수 있기에 자랑스럽게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바탕되어 많이 산다고 한다. 맞는 얘기인지, 재미로 한 얘긴지는 몰라도 없는 살림에도 꽃을 사랑하는 마음만 본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로 오래 있던 터라 여러 곳에서 프랑스 문화와 생활습관아 베여있는 것도 많다. 여기도 점심시간이 두 시간이라는데 나폴레옹이 오침을 즐긴 데서 연유되었다 한다.


베트남의 인구는 전 세계에서 13번째로 많은데,  2013년 공식 통계로는 9,300만 명 정도라 하나 비공식적으로 약 1억 2천 명 정도라고 한다. 자녀는 현재 2명까지만 허용되며 이름 없는 아이들도 많단다. 인구가 많다는 것은 미래가 있는 뜻이 아닌가. 며칠 있는 동안도 어디를 가던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청년들이 많았다.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를 달리는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였다. 20년 후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진다는 얘기에 마음이 울적하다.  


베트남은 산유국이고 여러 지하자원도 많으나 미래를 위해 아껴둔다고 한다. 어쩌면 개발할 여력도 부족한 것 같고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 개발권을 내주기도 바람직하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현재 기름 가격은 리터당 700원 정도며, 무엇보다 가장 풍부한 자원은 인력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월남전 이후에 태어난 인력이 70% 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육십 청춘이라고 하지만 여기선 육십이 면 존중받는 어르신이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지금은 없어진 대우그룹의 김우중 씨는 베트남에서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다. (김우중 씨는 2016년에는 생존했고 2019년 별세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영주권도 받았다고 한다. 대우가 베트남에 많은 사업을 하면서 사회에 많은 환원도 하고 기여를 해서 베트남 국민들에게 이미지가 아주 좋다고 했다. 전쟁 후에 베트남 사회주의는 경제 부분에서는 개방적으로 변모하여 중국처럼 정치는 공산주의이나 경제는 자유경제를 보장하고 있다. 아직은 열심히 개발도상 중이며 3% 내외의 부유층이 경제를 주관한다고 한다. 베트남에선 한국차가 많은 사랑을 받는다. 대부분의 동남아에서 주로 일본차가 많은데, 베트남은 50% 이상이 한국차라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한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베트남 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른 저녁을 먹은 후 맛사지샵에 갔다. 동남아 여행 시의 마사지는 빠질 수 없는 옵션이기도 하지만, 두세 시간 동안 정성을 다해 혈을 찾아가며 해주는 마사지는 여행의 피로를 풀어줄 뿐 아니라, 건강에도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여행객들만이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도 마사지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았다. 특히 직장인들, 젊은 친구들도 퇴근 후 마사지를 받으러 오는 점이 새로웠다. 마치 우리나라 스포츠센터를 찾는 것 같았다.


마사지를 받고 돌아오니, 10시 반이 넘었다. 호텔 창밖으로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난다. 고층아파트와 자동차의 행렬로 이어지는 한강의 위용과는 달리 다낭의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아름답게 치장한 다낭의 한강은 막 화장을 끝내고 화려한 아오자이로 한껏 멋을 낸 여인과도 같은 모습이다.


여행도 긍정적인 사람이 잘한단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만이라고 한다. 오늘 하루 낯선 곳에서 맛있는 과일도 먹고 아름다운 베트남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불만 없고 감사하지 않은가. 행복한 하루였다.



p.s : 이번 여행기에는 저장해 두었던 사진의 일부분이 없어져 적절한 사진을 올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전해드립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ost를 아이작 펄만의 바이올린 연주로 올려봅니다. 화창한 햇살 속의 선율은 슬픔보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울려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LgJQ8Zj3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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