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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Mar 06. 2022

스마트폰으로 쓴 베트남 다낭, 호이안 기행기 2

바나 힐, 호이안, 다낭, 여행 후기



2016.4.26

"카톡 카톡" 하며 이른 새벽부터 잠을 깨운다. 누르다 네시가 조금 넘어 일어난다. 발밑에서 강아지들이 나대지 않편안한 잠을 잤다. 침대에 기대어 여행용 작은 스케치북을 꺼낸다. 그림도 몸과 마음으로 자연스러운 표현을 해 내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를 그리더라도 완벽? 한 작품을 그려야 하는데 성질이 급해 후다닥 하는 편이다. 한편으론 어차피 유명 화가도 아니니, 하나라도 자주 그리는 것 낫다 생각한다. 연습이라도 되니까.

뭘 해도 정답은 없다. 그러니 틀린 것도 없다는 얘기다. 누르고만 살았던 자아를 분출시키고 다른 것들 허용하며 받아들이고 공존하는 모습을 배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배우고 싶은 그림을 배워 여행 다닐 때 스케치라도 하니 얼마나 즐거우냐. 뭐든 시작하기에 늦은 것은 없는 법이다. 여행할 때면 여러 가지로 돌아보게 된다. 자연스레 여유를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이다, 과일이 풍성한 아침을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바나 힐과 호이안으로 간다.  동료들과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하는 아침식사는 펼쳐질 하루의 여정도 밝혀 준다. 사람의 마음을 출발할 때의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더 솔직한 대화를 하게 되고 같은 꿈을 꾸며 바라보는 하루를 맞게 된다.


바나 힐(바나 힐 역)은 다낭 서쪽의 안남산맥에 위치한 케이블카 역이자, 리조트다. 1919년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프랑스 사람들의 휴양, 별장지로 사용하기 위해 리조트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해발 1500미터 높은 산 위에 위치해 날이 좋으면 멀리 바다와 주변 산맥이 보이는 멋진 경관을 갖고 있다. 2013년 개통된 바나 케이블카는 길이 5,801m로 가장 긴 논스톱 단일 트랙 케이블카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위키백과). 이렇게 높고 깊은 산꼭대기에 점령자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한 건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식민지 민족의 설움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랬던 곳이 오늘날 크게 발전해 유명 관광지가 되어 사람을 불러 모으는 곳으로 변모했으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 맞다.


베트남어로 바나는 "신성한 여인"이라는 의미며, 바나산은 영험이 있는 곳이라 하여 베트남 사람들에게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식민지 시대부터 있었던 건축물에 새로운 테마파크를 조성해 프랑스 마을을 꾸미고 각종 아름다운 정원 및 다양한 놀이시설, 산 위쪽에 도교사원과 호텔과 성당 등을 지었고 지금도 계속 짓고 있다. 2번 갈아타 이동한, 제법 길었던 케이블카 관광은 멀리 산맥의 기개와 다양한 모습의 산들감상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종착역에 도착했다.


하나의 작은 성처럼 만들어 인위적으로 조성된 표 여기저기서 나지만, 이 높은 곳에 세웠다는 것만으로도 감점을 주긴 어렵다. 놀이 테마 건물은 현대적인 놀이기구들로 채워져 아이 어른 모두에게 즐거움을 준다.

카페, 상점 거리를 걷다 베트남 물건을 파는 가게를 구경한다. 기념품을 파는 곳이라기 보단 베트남의 전통 예술품을 취급하는 제법 격조 있는 곳으로 회화작품도 많아 베트남의 역사와 정취가 많이 느껴졌다. 아이를 업고 있는 베트남 여인을 그린 작은 수채화 한 점을 샀다. 그림을 배우다 보니, 초보 작가가 그린 것이라도 작품의 고뇌는 담겨있다는 것 깨달아 간다. 명망 있는 작가가 그린 작품이 아닌 다음에야 모두 없어져 버릴 것들 일진 몰라도, 여행지에서 무명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한 점씩 사 모은 것도 어느새 여러 점 되었다.  아이업은 여인에게서 어제 가이드에게 들은 베트남 투쟁의 역사를 보는 듯했다.


성(城)? 내를 한 바퀴 돈 후 꼭대기 도교사원에 올라가기 전, 낯익은 mercue호텔 라운지에서 잠시 쉰다. 산꼭대기에 오성급 호텔이라니... 라운지에 앉아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매너는 아니지만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내겐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텀블러가 있어 물이나 음료를 항상 넣고 다닌다. 여행 중의 팁이라면 팁이다. 외국에선 커피를 시켜도 많이 주기 때문에 남기기가 아까울 때는 텀블러에 넣고 나중에 마셔도 된다.


누가 스쳐 지나갔을지 모르는 이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옷깃을 스쳐가도 억겁의 인연이 있는 것이 사람의 관계라는데, 관계를 제공하는 이 의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맞고 보내고 했을까. 나는 살아가면서 의자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고 받아들여주는 삶의 순간을 얼마나 제공하고 살았을까. 잠시 상념에 젖어 어설픈 철학자가 되어 본다.


오성급 호텔답게 클래식한 분위기로 연출된 호텔은, 실제 찾는 여행객도 많고 베트남 신혼부부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며 각 객실은 평지가 아니라 그런지 다른 건물로도 나뉘어 있다고 한다. 오늘도 신혼부부가 여기저기서 사진 찍는 것을 보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면 산꼭대기 호텔에서 하룻밤 자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우리나라 명산 산장에서 자연 그대로의 정경과 더불어 자는 것만 하랴 싶었다.


베트남, 새로운 눈으로 보니 괜찮다. 어디를 보나 젊은 사람들이다.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2020년 인구 9,758만으로 아시아에서 9번째, 전 세계에서 15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라고 한다. 놀랍고 부러운 점은 64세 이하 인구가 90%가 넘는데, 25~64세는 55.1%이며 24세 이하 인구가 37.3% 라고 한다(위키백과).  65세 이상 인구가 날로 증가하여 백세시대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위상이지만, 젊은 친구들이 북적이는 건 사실 부럽다. 미래를 본다면 베트남은 우리나라보다 젊다. 인구문제는 권력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외친다 한들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나이차별" 말고 50세부터 은퇴를 염려하기보단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어 개척해야 할 사회 분위기부터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꼭대기 절로 올라가 본다. 프랑스 식민지로 살았던 그 시절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프랑스 풍의 마을을 지나, 제일 높은 곳엔 절(도교사원)을 세웠다. 비록 식민지였지만 자신들의 뿌리와 신념을 잃지 않겠노라 한 기개가 보인다. 여러 분재와 연꽃으로 조경을 아름답게 꾸민, 절 같지 않은 절이다. 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불경드리는 할머니들을 속에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머니 모습이 보인다. 긴 산길을 올라 매일 아침 공들이려 작은 절에 오르셨던 외할머니였다. 무엇 때문에, 무얼 비시느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이른 새벽에 산을 오르셨을까. 그저 자식들의 안녕을 위해 비는 공양이었으리라. 외할머니의 신심과 불쌍히 여기는 긍휼함이 유전되어, 나 역시 신앙심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바나 힐은 여행객을 위한 곳이라기 보단 베트남 사람들의 즐거운 "쉼터"고 놀이공원 역할에 더 충실한 곳이었다. 이제 막 경제부흥의 재미도 느끼는 국민들에게, 케이블카를 타고 높은 산맥을 오르면서 즐기는 풍경과 장엄함을 통해 자국의 자연과 기술에 대한 자부심도 가지게 하면서 말이다.


바나 힐의 도교사원

바나 힐 꼭대기 정자에서 내려다본 도교사원과 유럽풍의 마을 및 테마파크


호이안으로 이동하는 차에서 호이안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인터넷에 나온 요약된 자료는 호이안의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호이안은 확실히 다낭과는 다른 분위기다. 씨클로와 오토바이, 논을 쓴 행상만 아니라면 호이안 구시가는 중국의 어느 마을을 연상케 한다. 호이안은 매력과 역사가 스며 나오는 마을이다. 점차 무역의 중심이 호이 안에서 다낭으로 옮겨 가면서 호이안은 졸지에 잊힌 항구 마을이 되었고, 그 덕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20세기에 베트남에서 일어난 많은 전쟁의 파괴에서 빗겨 나, 건축물들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남을 수 있었다(위키백과). 낮은 기와지붕의 집과 옛 모습 그대로인 도로 등에서 동서양이 복합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16~17세기에 베트남의 국제무역항구로 화교, 네덜란드인, 일본인들의 무역 활동이 활발했다. 해 많이 거주했으며 일본인들이 세운 건축물도 곳곳에 남아 있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C%9D%B4%EC%95%88


호이안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오래된 집인데, 상업성이 대단하다. 전부 장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을 팔던, 팔고 있다. 오래된 집을 그대로 둔 곳이 없다. 한 시간 정도면 구시지를 돌 수 있다. 여행자들 뿐만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도 거리를 걸으며 혹은 인력거를 타면서 구경하고 다닌다. 베트남 커피를 가벼운 가격으로도 마실 수 있으며, 먹거리와 쇼핑거리도 다양하다. 가죽제품이 유명하다는데 공방과 파는 곳은 많았으나 찾는 이가 많아져 그런지 가격은 싸지 않았다.



2016.4.27

오늘은 오행산을 들른 후 다낭 시내를 구경하고 밤 비행기로 출국할 일정이다. 오행산으로 가는 도중 가이드께서 쇼핑 물품 설명을 시작한다. 동남아 여행의 묘미는 물가가 싸서 적은 돈으로도 즐겁게 쓸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라도 하듯 면세점을 들른다. 때론 예의로 사는 것도 필요할 듯싶다. 이것도 가이드 친구와 한방을 쓰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사실 아니었던가. 지난 동유럽 여행기에도 썼지만, 어디든 패키지여행이 싼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오행산은 다낭 근교에 있는 산으로 손오공이 갇혀있다는 전설이 있다. 평지에서 솟아오른 듯한 다섯 개의 봉우리는 오행 (물, 불, 나무, 금, 땅)을 상징하며 도교, 불교, 민간 신앙 등 다양한 종교적 요소가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습하고 무더운 전형적인 동남아 날씨에 오행산을 오르려니 힘들었다.  


너무 더워 작은 동굴 쪽으로 갔는데, 입구 쪽이 정말 시원했다. 올라오는 동료들이, 아래는 별로 안 시원하다 한다. 정말 내려가 보니 덜 시원하고, 다시 올라오니 아까 그 입구가 시원한 것이 아니라 더웠다. 같은 장소인데 불어오는 바람이 달라졌겠는가? 올라가고 내려오며 움직였던 내 몸이 다르게 느끼는 것이다. 세상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세상을 보는 내 상태에 따라 좋기도 힘들기도 한 곳이 되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가서 깨닫고자 했던 진리를 동굴 속에서 해골물을 먹고 깨달았던,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 ;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와 무슨 다름이 있겠는가. 인생 그런 것이다.


이 산에는 개들이 많았다. 마침 아침에 삶은 달걀 두 개를 챙겨 왔는데, 한 녀석을 불러 하나를 온전히 까서 주었다. 처음엔 움찔하더니, 껍질 까주는 동안 잘 기다리면서 먹고 갔다. 어쩌면 이 녀석이 삶은 달걀 하나를  먹은 것은 평생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에게 얘기했는지 잠시 후에 다른 두 녀석이 온다. 신기한 것은 두 녀석껍질 까는 동안 서로 으르렁대지도 않고, 얌전히 기다린다.


그전에도 느꼈지만 동남아 개들은 참 순한 것 같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 큰 욕심이 없이 순하고 대적하지 않으니 그것도 배우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사는 유기견이라도 더운 나라라 추위 걱정은 없고, 먹을 것 주면 먹고 못 먹으면 굶고 사니 개들은 비교적 말랐지만 사납지 않았다. 작년 시카고 갔을 때 거기 개들은 대부분 까칠했다. 시카고 시내에 개 놀이터가 있었는데, 거기서 만난 개들은 겁내기도 하고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물론 개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겨야 사는, 성공해야 하는 세상에 살아서 그런가? 선진국의 개가 되려면 우선 이기고 봐야 하는가?



오후에 다낭 비치로 왔다. 길게 뻗은 백사장에 해수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다낭 사람들은 겉옷 속에 수영복 입고 물에서 놀다가 나와선 닦고 그대로 겉옷을 입고 간다. 말 그대로 누구나 즐기고 싶은 사람은 즐기는 것이다.  외곽 쪽으로는 유수의 호텔과 컨트리클럽들이 이어졌었지만 이 바닷가는 개발 중이라 그런지 상업적인 시설들이 많지 않다. 도로 옆 해변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아직은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누구라도 더운 육신을 편히 식혀 갈 수 있도록 그대로 남겨졌으면 싶었다.


다낭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한식으로 먹고  우리 일행은 한강 유람선을 탔다. 배안에서 무명가수가 노래한다. " I’m sailing… " 허스키한 목소리왠지 서글픈 인생을 보는 듯하다. 네온사인으로 휘황찬란한 한강을 미끄러지듯 가로지르며 다낭에서의 마지막 밤은 흘러간다. "리한"이라는 이름의 가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 후, 앙코르곡으로 본인의 곡이라는 “온몸으로 산다는 건” 제목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도 떠나온 과거도 아닌, 늦은 밤에 떠나갈 미래도 아닌, 적당하게 시원한 밤바람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즐기며 현재를 몸으로 느끼며 즐겁게 배를 탔다.


시내에서 10분도 안 걸리는 공항으로 이동한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한 시간 늦게 티켓팅 하느라 다들 공항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부지런히 움직여 다낭과 주변 옛 도시의 아름다운 정취를 잘 보고 간다. 동남아답게 다양한 열대과일을 끼니마다 후회 없이 먹어서 좋았고, 일상의 후회와 머뭇거림 속에 자주 쭈뼛거렸던 마음이, 며칠 동안의 환기로 청량한 에너지로 채워져 좋았다. 연착된 비행기는 12시가 넘어서야 지친 몸을 태운다.




여행후기


베트남의 현대사는 "호찌민"과 "보 응우엔 지압"장군(레드 나폴레옹이라고 할 정도로 오늘날의 베트남을 건국한 유명한 장군이다), 그리고 "틱꽝득" 스님, 세 사람에 대해서만 제대로 이해해도 알 수 있다고 한다.

호찌민은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 불변의 마음으로 만반의 세상에 대응한다), 내 안에 변하지 않는 신념으로 만인의 신념을 변화시키겠다", "자주독립"이라는 절체절명의 원칙은 바꾸지 않겠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현실주의 철학으로 마침내는 베트남을 그의 신념으로 통일시키는 데 성공했다.

 

호찌민과 함께 베트남의 양대 거인으로 추앙받는 지압 장군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과거는 과거일 뿐 미래는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을 통해 미래를 위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종교적인 자유를 위해 분신한 틱꽝득 스님의 얘기는 전편에서 다룬 바 있다. 식민지와 내분으로 얼룩진 베트남의 역사는 우리와도 닮은 점이 많다. 파란만장한 베트남의 역사와 우리를 "모토"로 열심히 개발하고 있는 그들 삶의 모습들을 두 편의 글로 다 얘기할 수 없지만, 멀고도 가까운 이웃이기에 앞으로도 기회는 많을 것 같다.


다낭과 호이안은 남쪽에 위치해 있어, 북쪽의 하노이와 하롱베이 등과는 다른 면도 많았다. 하지만 남이든 북이든 베트남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단합되어, 정치노선은 사회주의지만  경제노선은 자유경제를 택해 국가부흥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 이미 10대 선진국에 돌입한 우리나라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하나, 반면 너무 부족한 자원으로 미래 먹거리에 대한 불안도 앞선다. 지금은 우리보다 많이 부족한 베트남이지만 풍부한 자원, 무엇보다 넘치는 인력자원이 부러운 이유다. 코로나가 끝나고 활기찬 일상이 찾아 올 그날 함께 다시 찾고픈 베트남을 그려보며 글을 맺는다.                     202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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