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가 이상하다. 아픈 것 같다. 새벽녘에 쓰다듬어주니 갑자가 "악"하길래(그러고 보니 자다가 요새 가끔 그러긴 했다) 놀라 만져주니 또 멀쩡하다. 괜찮겠지 하고 일어나니 평소 같으면 먼저 뛰어나가 거실 소파에 앉았을 텐데, 방문 앞에서 구부정하게 웅크리고 서있다. 눈에 초점을 잃은 것 같이, 어디로 갈지 몰라 그런 것처럼...
안아서 화장실에 넣어준다.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볼일도 안 보고 그대로 쭈그린다. 다시 "보리야 쉬해야지" 하고 잠시 두니 쉬는 하는데 화장실 문 앞에서 쭈그리고 앉는다. 웬일이니... 일 끝나면 후다닥 뛰어서 제자리로 가던 녀셕인데 십 년 가까이 한 번도 저런 적이 없었는데... 아침밥을 챙겨, 보리야 밥 먹자 했더니 승리는 정신없이 먹는데, 보리는 한참 쭈그리고 서서 보더니, 먹을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먹긴 먹었다.
먹고 제자리도 못 가고 또 웅크리고 서있다. 앉혀놓고 조금 있다 화장실 데려간다 (보리는 실외 배변을 좋아해 혼자선 화장실을 잘 안 간다. 그래서 아침식사 후 습관적으로 화장실 가도록 했다. 깜박할 경우엔 저지리 할 때도 있기 때문에. ) 그래도 볼일은 잘 봤다. 안고 자리에 뉘어 이불 덮어주니, 웅크리고 신음소리도 없이 미동도 안 한다. 머리가 뜨겁다. "나 어디가 아파.."라고 말이라도 하면 좀 좋으련만... 제 몸이라도 남이 알아서 봐줘야 하니.. 속이 어떤지, 혹 머리가 이상해 진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병원에선 9시 넘어오라 하고. 찬 물수건으로 조금 닦아준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8시 40분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동물병원에 왔다. 체온을 재보니 39.9도로 좀 높긴 하다고 한다. 그런데 진료할 때에는 아파하지 않고 소리도 안 지르고 얌전히 있다. 보리 나이를 묻고 중성화 수술했냐고 물으시길래 했다고 하니, "그럼 큰 문제는 없을 텐데..." 그러시면서 열이 좀 나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 맞다고 하신다. 딱히 뭐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사람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특별한 이유가 없이도 아픈 때가 있지 않은가 보리도 그럴 수가 있으니까 오늘 조금 두고 보자면서 주사를 3대 놓아주신다. 어제 바람이 심했는데, 마당에 수선화와 백합 모종 심느라 바깥에서 한 시간 정도 놀려서 그런 건가, 기침은 안 했는데.. 감기 걸린 건가... 온갖 생각이 든다. 보리는 워낙 바깥을 좋아해서, 밖에서 놀지 않으면, 집안에서도 바깥 내다보는 게 일이고, 지나가는 사람, 차 인기척만 나도, 짖는 게 일인 강아지라 식구들이 바깥에 있을 때는 꼭 데리고 나가서 함께 하는 편이다.
약을 달라니까 그냥 보자고 하시고, 밤에 열나면 어쪄냐니 해열제도 주사에 넣았다고 한다. 그렇게 주사만 맞고 집으로 오는데 신기하리 만큼 방금 전까지 늘어졌던 얘가 약간은 생기가 돈다.
보리가 조금 괜찮아졌다. 너무 다행스러웠고 감사했다. 아침부터 갑작스레 너무 놀랐지만... 집으로 오는 길에 gs에 들러 간식 하나 사서, 주니까 잘 먹고 집에 와서 승리하고 반갑게 맞는다. 햇살 따뜻한 거실, 제 방석 위에서 마당 쪽을 바라보며 짓고 있다 "으릉으릉" 거리는 보리 특유의 목소리를 내면서...
이제 뭐라도 좀 먹어야겠다, 싶어 준비하는데 한 시간이 지났을까. 얘가 또 늘어진다. "아니 왜... " 그럼 좀 전에 조금 나아졌던 것은 주사약 기운이란 말인가? 좋아하는 간식을 주려, 불러도 오지 않는다. 고개도 당당하게 들고 있지 않고, 구부정하게 서서 아래로 떨군다. 마음이 찢어진다. 늘어져서 자고 게으름을 피우는 게 아니라, 평상시와 다른 행동이 나를 걱정시키는 것이다.
( 아침에 화장실 앞에 늘어진 보리 ) ( 오후에도 좀 늘어져 있다 )
"왜 그러니... "인터넷을 뒤져보니, 강아지 바베시아 병? 진드기에 물려 생기는 것이라는데, 증상이 약간 비슷한가 싶어 자세히 보니 이건 아니다. 잇몸도 하얘지지 않고, 먹는 건 먹으니.. 어떤 몰티즈 친구 얘기가 있는데, 보니 비슷하다. 밥 먹고 볼일도 보는데, 늘어지고, 움직이지 않고 기력이 없다는 것. 10살이고, 자세히 읽어보니, 병원에 데려가서 이것저것 확인했는데, 특이사항은 없고 "근육 피로증"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주사 맞고 약 지어 오고, 하루 지나니 원상 복귀되었다는 얘기다.
보리 증상하고 가장 비슷한데, 왜 여기 선생님은 약은 안 주셨을까 하는 생각 든다. 낼 아침엔 괜찮겠지.
열은 아까보다 조금 낮아진 것 같은데.. 혹시라도 바깥에 나가고 싶은가? 옷을 든든히 입혀 집 마당과 길 위쪽으로 잠깐 산책시킨다. 뛰지는 않지만, 오늘 못 봤던 모습이다. 나가니 걷는다. 마당에서 소변도 본다. 산책 몇 분도 안되어 안고 들어와 발 씻긴다. 바람도 불고 있는데 잘한 짓인지도 모를 걱정에..
그런데 좀 활기차 보였다. 어제 찬바람에 약간 몸살끼(사람으로 치면..)에 근육 피로증이 겹쳤던 걸까? 나는 잠시 자리를 비워보기로 했다. 혹 아무도 없을 때 좀 쉬면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올까 싶어서...
급히 워킹 차림을 하고, 동네 뒷산에 다녀왔다. 집에 오니 보리가 반갑게 짓으며 나왔다. 보리야 다 나은 거야? 괜찮은 거지? 평소 같진 않지만, 아까 늘어졌을 때 보단 나은 것 같다. 그런데 샤워하고 나오니, 또 늘어져 있다.
"아 도대체 왜 그러니..."
어딘가 이상이 있는 것 같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큰 탈은 없어야 할 텐데... 병원에 다시 전화해보니, 토하지 않고 먹기는 하니까 지켜보라고 하신다. 건드리지도 말고 그냥 놔두라신다.
선생님 말씀대로 오늘은 지켜보자. 사람도 몸안 좋으면, 누가 기척만 해도 귀찮은 것처럼 어쩌면 보리도 오늘 어제오늘 컨디션이 너무 안 좋은 "근육 피로증" 인지도 모른다
어느새 오늘 하루가 다 간다. 조금 늘어진 듯했다가 저녁밥을 주니 다행히도 잘 먹는다. "잘 먹으니 두고 보자" 하시던 선생님 말씀대로 오늘 밤만 지나면 정상 컨디션을 회복하겠지..
"보리야 아프지 마라" 아프면 너무 걱정이 되고 내 마음이 아파... 아프지 말고 잘 놀고 건강하게 잘 지내자 하고 만져주고 쓰다듬어 주니까 보리는 눈을 깜박인다. 말은 못 해도 마음은 느끼고 있는 걸까?
사실 보리는 트라우마가 있다. 요크셔테리어가 원래 용감하고 까칠한 아이인데,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큰 수술을 했었다. 제법 긴 철심을 박고 교정했는데, 안 빼도 된다고 해서 지금도 오른쪽 발에 철심이 박혀 있다. 만지면 불뚝 나와 있어 신경이 쓰인다. 철심 제거를 했어야 하나... 그때 병원에서 개는 그냥 둬도 된다고 해서, 두 번 수술 고통 안 주려고 그랬는데, 나이가 드니 마음에 걸린다.
다리가 약한데도 유난히 걷는 것을 좋아한다. 등산도 좋아하고 바깥에서 산책하며 냄새 맡는 것을 워낙 좋아하니, 항상 주의하고 무리 않도록 조심한다. 개 나이 10년이면 사람 나이로 65세 정도 되니,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할 나이기도 하고, 평소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 보리 3개월 때 ) ( 보리 발 수술하고 치료 중에 )
개를 말 못 하는 짐승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개를 키워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심정이 어떤지 모른다. 개는 짐승이 아니라, 어쩌면 어린아이 같은 존재다. 다만 개가 아이와 다른 점은 아이는 커서(아니다 걷기 시작만 해도..) 제 의지로 제 고집으로 부딪혀 가지만(물론 삶을 개척하고 인생으로 사는 것이다...), 개는 올 때도 그랬지만, 갈 때도 누군가의 품 안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평생을 아이처럼, 어린 자식처럼 거둬야 하는 게 "개"다.
개를 키운다는 건 하나의 삶을 온전히 보고 겪는 것이다. 개의 수명은 의학이 발달했어도 인간의 1/5? 수준인 15~20년? 정도로 우리 인생보다 짧은 세대를 보낸다. 자연의 모든 순리대로 사는 생명의 한 세대를 곁에서 보는 것이다. 생명의 태어남과 자람, 그리고 떠남을 오롯이 볼 수 있고 과정을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세대 자체가 우리보다 짧아, 우리의 삶에서 다 보지 못한 것까지 개를 키움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 번의 삶을 마무리하게 될 정도가 되면 누구라도 삶의 철학자가 되지 않겠는가...
먼 언젠가 마무리될지는 모를 내 강아지의 삶을 보고 있는 나도 철학자가 되고 있다.
개를 키운다는 것은 하나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다. 함께 있어야 하며, 언젠가는 보내주는 것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손 안에서 컸고, 기쁨과 위로를 주던 발랄했던 녀셕이 늙고 병들어 연약해지고, 이별의 아픔과 남겨지는 슬픔까지 주면서 떠나는 삶에 고통스러워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
녀석이 주는 것은 무엇인가
함께 있으려 한다는 것 뿐이다. 그게 사랑이다. 왜냐면 녀셕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주인과 함께 하는 것 만을 원한다. 아주 이기적이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개를 키우면 철학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보리야 오늘 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지? 그래서 내일은 보리가 좋아하는 산책 많이 하자~
평소 이유 없는 사랑과 치근댐도 나를 철학자로 몰아가고 있는, 기도하는 저녁이다.
(어제 찍은 사진) ( 보리는 언제나 고개를 높이 들고 가족들을 쳐다 본다~ ) (보리가 4살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