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 가이드를 만난다. 그리스에서 39년째 살고 계신다는 분이다. 그리스어로 "깔 리메라(안녕하세요, 아침인사)"하며 반갑게 소개한다. 함께 할 기사분과 이틀의 짧은 여정이지만 800km를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는 살기 편한 곳은 아니나 살기 좋은 곳이며 일조량이 풍부하고 여름에도 비가 잘 안와 맨발로 다녀도 흙이 안 묻는 곳이라고 한다. 조르바가 맨발로 다니던 나라 그리스, 희랍에 발을 디뎠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슬리퍼라도 걸쳤지만, 디오니소스는 맨발의 철학가였으리라.
나도 이 땅 어느 곳에서라도 맨발로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살짝 든다.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함께 강력한 도시국가(최초의 민주주의)였고 철학, 문학, 의학과 수학 등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된 그리스 문명을 꽃피운 곳으로, 도시의 수호신이 되기 위해 "포세이돈(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지혜의 여신 "아테나(지혜와 올리브나무 )"의 이름을 따 "아테나이"라고 불렸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리스의 수도다.
고대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도시 국가로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은 미케네와 아테나이, 필로스, 티린스 등이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그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다. 예술과 교육, 철학의 중심지였으며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소포클레스 등 많은 학자와 저술가 정치가들의 자유로운 발상과 토론은 그리스 문화를 성장시키고 오늘날까지도 증명되고 있는 수학, 과학 등 학문적인 발전로 이어졌다.
고대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이끈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지금 들어도 공감되는 명연설로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우리의 정체가 민주주의로 불리는 까닭은 권력이 민중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도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합니다. 누군가를 다른 사람에 앞서 공직자로 뽑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특정 계층의 일원인지 보다는 실제적인 능력을 중시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몰자 추도 연설 중 (나무 위키)
아테네가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에 의해 정복당한 후 헬레니즘 시대가 열린다. 이후 로마에 합병된 기원전 146년까지의 기간 동안 헬레니즘 문화는 과학과 철학 자유로운 학설의 전개로 다양한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했던 동방의 학문과 문화와 혼재되어 헬레니즘 문화 특유의 꽃을 피웠다.
그리스는 로마가 정복했지만 여전히 아테네의 아고라를 통해 문명과 정치를 이어가며 존속하게 되고오히려 그들의 문화는 로마인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갔다. 로마 상류사회에서는 그전부터도 그리스의 문화, 철학과 정치, 문학이 많은 영향을 미쳤었고 로마의 속국이 된 후에는 로마뿐만 아니라 로마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유렵 전반에 걸친 문화적인 토대를 놓게 된다. 여러 문화와 학문이 골고루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는 서구 유럽의 문화, 학문 정치적인 토대를 구축하는데 자양분이 되어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는데 영향을 미치고, 오늘날까지도 유럽과 세계문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명칭을 그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다. 이후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동로마는 십자군 전쟁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동로마제국의 치하에 있던 그리스는 문화적으로 동로마제국을 그리스화 시키며 비잔틴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뺏고 빼앗기기를 반복하던 십자군 전쟁은 결국 1453년 4차 십자군 전쟁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동로마제국은 사라지게 된다. 이때부터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일부는 이슬람 지배를 피해 서유럽으로 옮겨가며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데 기여하고 남은 이들은 그리스 정교회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들의 문화를 이어간다. 중세 이후 그리스는 19세기 독립할 때까지 오스만 제국에 지배당한다. 기원전 500여 년 전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이 지금까지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그리스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의 중세 역사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서구 유럽은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와 개혁으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리스의 중세시대는 화려했던 과거의 추억으로 덮여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후일 어찌 평가받을지도 모를 행동을 과감하게 실천해 온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인류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들의 확고한 신념이 먼저였다. 옳고 그름은 때에 따라 편리하게 구분 짓는 인간의 잣대일 뿐이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순환고리로 이어진 인류 역사도인간의 본성과 무관 치 않다. 매일 매 순간을, 선택하고 버리는 결정의 반복 속에 이어가야 하는 삶 역시 지배하느냐 당하느냐에 따라 스스로의 주인이 달라짐을 경험한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패자가 될지도, 아무리 움켜잡아도 결국엔 놓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부여받은 인간이기에 오래된 역사 앞에 겸허함을 배우고 공존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유럽에 올 때면 늘 느끼는 점이긴 하지만, 선조들이 남긴 유산이 아득히 먼 훗날의 자손들에게까지 마중물로 이어진다는 부러움... 우리에게도 남겨져 있는 좋은 유산들과 환경들을 현재를 위해 몽땅 써버리지 말고 미래의 우리 자손들에게까지 남겨 줄 수 있는 마중물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산 티그 마 광장 앞 국회의사당
보고 싶었던 그리스의 차창밖 시내 풍경은 그다지 활달해 보이진 않는다. 빛바랜 과거의 영광은 역사로만 남겨져 있는 것에 불과한 듯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힘든 현실의 모습은 스산해 보인다. 2008년 덮친 경제위기로 유럽에서도 가장 먼저 국가부태 위기로 국가파산 직전까지 간 힘든 경제 상황이 아직 극복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곳이 아테네가 맞는가 할 정도로 피폐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짧은 일정에 아테네 시 곳곳도 제대로 보지 못한 개인적 의견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2017년 들어 어느 정도 빚을 갚고 2018년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끝났다고 하지만, 버스를 타고 둘러보는 내내 생기 있는 거리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우리나라도 1997년 국가부도 사태로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는지라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민족성의 차이인지는 몰라도 허리띠를 졸라 매고 온 국민이 힘을 합쳐 2001년 IMF사태를 종식시켰던 우리 국민의 단결성을 새삼 이곳에 와서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버스투어를 하던 중 산 티그 마 광자에 내려 중간에 내려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본 후에 우리는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과 아크로폴리스는 인간의 의지와 역사가 남아있는 흔적이라 생각한다. 오래전 학문과 예술과 자유가 태동되고 자라나며 뻗어 나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곳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차원의 민주주의, 그래도 그 옛날에 그런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엔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어로 높은 의미의 아크로(ἄκρον 아주 높은, 최상의)와 폴리스(πόλις 도시)가 합쳐진 뜻 그대로의 이름이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건축물들이 모여있는 높은 산(언덕)에 형성된 바위 위에 세워진 성채라고 할까. 고대 그리스에는 지역마다 이러한 아크로폴리스가 많이 존재했지만, 오늘날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지칭한다.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로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는 건축, 문화,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기원전 5세기에 파르테논 신전, 프로필라이아, 에레크테이온, 아테나 니케의 신전 등을 건축하도록 하였다.
가장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아테네의 수호자로 불려지던 아테네 여신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고대 그리스 건축물 중 가장 알려져 있으며 도리아 기둥 양식의 정점으로 알려진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와 아테네의 민주정치, 나아가 유럽 문화권의 오랜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념 건축물로 인정받는다(위키백과).
아크로폴리스 유물은 언덕 남쪽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유리, 철, 시멘트 등 썩지 않는 재질로만 만들었다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무너져 흔적으로 남은 그리스의 역사를 대변하려는 의지에서 그렇게 건축했을까. 진도 10.4도 강지진에도 끄떡없다는 의지로 다져져 있다. 아쉬웠지만 후일을 기약하며 아크로 폴리스를 떠난다.
아크로폴리스의 감동을 뒤로하고 북쪽 "테르모필레"로 향한다. 그리스에서 오랜 생활을 한 가이드께서 그리스의 실상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외국여행을 할 때 그곳에서 직접 살아보지 않는다면 현실을 다 이해하긴 힘들다. 그래서 때론 현지에서 오래 생활한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것도 필요하다.
예전 한인사회에는 철학 전공생과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사관 직원들이 많았다는데, 요즘은 여행사, 기업의 주재원들이 많다고 한다. 300여 명 정도의 교민이 상주한다고. 본인은 현지인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두고 있다고 한다. 연평균 17도를 유지해 사는데 자연환경으로 인한 불편은 크게 없다고 한다. 분지가 많고 연 3,000시간 이상의 풍부한 일조량 덕에 하얀 집들이 많다. 파란 하늘과 바다에 하얀 집들의 언덕 산토리니의 집들이 흰색을 유지하는데도 이유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선의 구분이 없었으니, 지식은 말하는 것의 영역이고 지혜는 듣는 영역이라는 고금의 명언이 다시금 마음에 와닿는다. 지식 있는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할 때 지혜롭게 듣는 사람들은 경청한 후 자유로운 토론으로 이어지고 이 토론은 민주주의와 학문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는 민회, 500인의 평의회, 그리고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제도로 이루어졌는데, 2,500여 년 전에 이미 배심원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스가 얼마나 민주적으로 정치를 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아 완벽한 민주주의라고는 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는 배심원제도가 2500여 년 전에 시행되었다는 사실에 부럽기까지 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아테네 시내 정경
보수 중인 파르테논 신전
이 들꽃은 수천 년 전에도 피고 있었을까 / 아크로폴리스의 에레크테이온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아테네, 원형경기장 아래 박물관이 보인다.
몇 시간을 달려 테르모필레에 도착했다. 스파르타의 패망으로 이어졌지만, 유명한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산의 절벽과 해안이 접한 험준한 지형 탓에 적은 수의 스파르타군이 엄청난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며칠씩 접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고 한다. "테르모필레"전투의 명장 "레오니다스"의 장엄한 동상만이 외롭게 서 있다. "This is Sparta 여기는 스파르타야!" 싸움에서 결코 후회하지 않는 스파르타의 정신을 완벽히 보여줬던 영화 "300"의 명대사. 죽음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 영웅호걸들이지만, 그들의 목숨까지 바치게 했던 신념이 있었기에 역사는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곳이 테르모필레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출한 조형물 외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사진을 찍으며 쓸쓸한 주위를 둘러본다. 유구한 역사에 죄송한 생각도 들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이곳은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저 숲 한편에서 잠시 족욕을 하며 쉬어가도록 할 뿐이다.
고대 스파르타는 엄격한 규율로 알려져 있지만, 용서받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동성연애 (플라토닉 러브, 전우애를 말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밥 훔쳐 먹는 것(인정 가능하게 훔쳐먹는 조건으로)이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는 신화에서도 알려져 있듯이 동성 간 특히 남자 동성 간의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나 이상적으로 생각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스파르타에서 용서를 했다는 사실은 그들도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듯싶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전부 지도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리쿠르고스"로 불려졌던 지도자는 금, 은화를 없애고 철주화를 쓰게 하고 집을 지을 때도 사치를 금지하기 위해 도끼와 톱만 사용토록 하며 15명은 있어야 식탁을 차리고 그 속에서 한 얘기는 문지방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익히 알고 있는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과 정치를 주입하여 강력한 체제로 이어왔지만 27년 동안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상처를 입고 내리막길로 내닫는다.
햇살이 풍부한 그리스임에도 오늘 테르모필레는 유난히 흐리다. 서늘하기까지 한 날씨에 견공은 세월과 아랑곳없이 편하게 누워 잠을 잔다. 유적지를 잘 개발하지 않는 나라들에선 오래된 역사의 흔적도 그저 개와 고양이들의 편안한 안식처일 뿐이다. 어쩌면 남겨진 유적들도 그저 살아온 흔적에 불과한 것이니, 동시대를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안식을 제공한다면 그도 좋은 일인지 모른다. 우리는 족욕을 잠깐 즐긴 후 버스에 올라타고, 메테오라를 향해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