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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Jun 09. 2021

스마트폰으로 쓴 터키 기행 5

이스탄불,  여행후기



2013.6.22

이스탄불같은 대도시에서도 이른 새벽은 애잔 소리 외엔 조용하다. 애잔은 네시부터 울려 나온다. 오늘 호텔에서 들리는 애잔은 다른 곳에서 들었던 소리보다 덜 구성지다. 파묵칼레에서 들었던 애잔 소리가 가장 길고 구성졌다. 역사의 영향도 한 몫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신심을 생각하면 부족한 믿음은 부끄러워진다. 매일의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얼마나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는 물음에는 당당하게 답하질 못하겠다. 삶의 염려와 번민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은 이스탄불 시내 다닌 후 열두 시 넘어 밤 비행기를 탄다.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니, 한국의 일이 엊그제 일 같다. 하룻사이 생각에도 이런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처음 여행이 아님에도 며칠 동안 딴 세상에 와 있는 듯했는데, 아마 현실과의 괴리감을 못 느꼈던 것인지. 어쨌든 정신의 정화를 좀 경험한 것 같아서 이번 여행이 좋다.


여행을 떠나기 전, 먼저 나그네의 마음으로 다닐 것인가?  개척자의 마음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나그네의 마음으로 간다면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아무런 구속됨 없이 느끼며 자아를 돌아보고 비우며 다니면 된다. 한편 개척자의 마음이라면 가는 곳마다 사진 찍으랴 필요한 것 구하느라, 이때 아니면 어디서 또 보랴 라는 마음으로 바삐 다니게 된다. 아마 요즘 대부분이 이런 개척자의 기분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일 듯싶다. 나그네의 마음이 혹은 개척자의 마음이 더 낫고 덜하다는 말은 아니다. 


나처럼 나그네의 마음으로 여행한다면서도, 개척자의 모진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이번만 해도 카메라 두대에 망원렌즈까지 가지고 와서 몸이 여간 고생하는 게 하니다. 인터넷 상에서 멋있는 여행사진, 여행 소개한 블로그를 찾는 일도 어렵지 않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서부 개척자의 마음으로 이미 루트가 정해진 여행지 질지라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틈새를 발견해, 새로움을 입히기도 한다. 도전하는 자에게 구태의연함은 없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도시, 갇힌 바다 흑해로 가는 유일한 통로인 보스포러스 해협을 품고 있는 이스탄불은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의 이름으로 여러 번 바뀌어 가며 불려졌던 만큼 다양한 문화와 색깔을 가진 국제적인 도시다.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이스탄불은 유럽과 중동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로 알려져 있다. 로마와 예루살렘과 더불어 기독교의 3대 도시 중 하나기도 한 이스탄불은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유적도시다.  


이스탄불은 BC 6세기경 그리스인들이 비잔티움이란 이름으로 도시를 세우고,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다가 알렉산더 대왕이 통치하기도 한다. 이후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4년에 수도로 정한 후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려지며 그리스도교 포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야심 차게 기독교 국가의 수도로 세운 것이 의미하듯, 이스탄불은 종교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후 동로마의 수도로써 천여 년간 명맥을 이어오다, 6~13세기 동안 아랍과 러시아 불가리아 등에 포위당하기도 하고, 동로마가 쇠퇴하면서 로마 교황의 역할 아래 십자군 전쟁으로 뺏고 빼앗기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로마 가톨릭에 지배당하다, 1261년 다시 동로마(비잔틴) 제국으로 회복되었으나 전쟁의 여파로 도시는 극도로 약해지고 만다. 결국 1450년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에게 정복당한 후, 천여 년의 역사는 사라지고 오스만 터어키 제국의 역사를 쓰게 되며 이스탄불로 불리게 된다. 


그때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터키의 수도로써 유지되다, 1935년 수도가 앙카라로 이전된 후 이스탄불은 문화와 경제와 역사의 도시로 터키를 대표하게 된다.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는 이스탄불은, 주요 역사 유적과 상업 문화적인 장소가 주로 유럽지역 이스탄불에 속해 있다. 



아야(구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정식 명칭: 하기야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세운 동방 정교회 성당이었으나, 군중 폭동과 대화재 등으로 파괴가 많이 되어 537년 유스티니아우스 황제 때 재건된 후, 동로마가 멸망될 때까지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유지되어 왔다. 이후 오스만 터키에 정복당한 후 기독교 문양의 흔적을 지우고 재건되어 황실 모스크로 사용되었다가, 근대 오스만 터어키가 멸망하고 신생 터어키 공화국이 생기면서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터어키의 국내 정치로 인해 다시 모스크로 전환된, 애환 어린 오랜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건물이다. 


아야 소피아와 쌍벽을 이루는 블루모스크(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내벽을 장식하고 있는 푸른빛의 도자기 타일 때문에 모스크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는 16세기에 건축한 오래된 모스크다.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오스만 터키 군주가 기거했던 톱카프 궁전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며, 술탄의 귀하고  화려했던 온갖 보물들을 전시한 보석관, 무기관, 복식관이 있고, 우리가 방문한 오늘은 오랜만에 시계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특히 보석관에는 "은수저 다이아몬드"라고 불리기도 하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다이아몬드가 있다. 은수저 다이아몬드로 불렸던 이유는 어떤 사람이 그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는데, 은 세공업자가 그것을 보고 당시 꽤 값이 나갔던 은수저 세벌과 바꿨다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귀중한 물건이라도 그걸 알아보는 사람에게서야 제 값어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빗대어 전해 내려온 얘기인 것 같다.


공사 중인 소피아 대성당 내부 천장

톱카프 궁전에서 바라본 보스포러스 해협

톱카프 궁전 입구와 블루모스크

소피아 대성당의 황금 모자이크 성화

톱카프 궁전 안


이스탄불의 볼거리 중에서도 아름다운 바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이스탄불 시를 관통하며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이어주며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해협이다. 이스탄불의 많은 유적지와 더불어 보스포러스 해협은 터키 사람들은 물론, 많은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다. 각양각색의 유람선은 동서양이 만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며 상쾌한 자유의 바람 속에 모든 시름을 가르고 달려간다. 


흑해와 마르마라해가 서로 뒤엉켜 있기에, 더 시리게 푸르른 이스탄불의 바다는 신기하리만큼 비린내는 안 나지만 갈매기 소리는 많이 들린다.  이번 여행에서 자신에게 더 솔직해진다.  매번 여행을 하나의 전환기로 삼을 것처럼 의미를 두고 다니지 않겠다고. 그냥 떠나온 것이고,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맞고 순간을 즐길 것이다.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딱지처럼 붙어 다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놓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스마트폰도 충전하노라면 열을 받는데,  늘 "개혁과 변화"를 부르짖고 스스로 충전하고자 해왔으니, 배터리처럼 얼마나 열 받고 사는 인생인가.


유람선에 탄 사람들은 온몸으로 자유를 느끼고, 바람 속으로 근심 걱정을 다 날려버리며, 역사의 흔적을 공유한다. 저 멀리 아야 소피아와 톱카프 궁전이 보이고, 그 옆에 살짝 블루 모스크도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해협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었다가, 혹은 사라져 갔을까. 안쪽으로 마르마라해와 유럽과 아시아가 마주 보고 있는 가깝고도 먼 대륙의 아픔을, 이스탄불과 이 바다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결국 삶이란 것도, 때론 전혀 상반되는 것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가기도 한다.


유람선을 타고 둘러본 이스탄불의 바닷가 정경


프랑스 장교 피에로티의 애달픈 이야기가 서려 있다는 피에로티 언덕에서 터키 차 한잔을 마시고, 골든혼을 보며, 떠나기 전 여유를 즐기고 있다. 여기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즐기며 휴식을 즐긴다. 여행 중에 잠시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 고맙다. 앞에 홀로 앉아 계시는 할머니는 팔십도 훨씬 넘어 보이시는데 히잡을 썼어도 자유롭게 무슨 생각에 하시는지, 아마 오래전에 함께 오셨던 할아버지를 그리워하시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골든혼 만 바라보고 계신다. 


할머니께 눈인사를 하고 앞 빈자리에 앉았다. 아파트가 앞을 가로막지 않고 확 트인 바다와 다양한 모양의 오래된 건물들, 통일감이라곤 푸른 숲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붉은 기와지붕이다. 회색의 아파트 숲에 끼여 사는 사람에겐 확 트인 시야만도 호사다.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얘들이나 어른이나 끼리끼리 가 아니고, 경치도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처럼 사람들도 다양하고 조화롭게 살아간다. 


홀로 계시던 할머닌 가시고, 다른 할머니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손자와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손녀가 와서 빵을 먹고 있다. 나는 의자 넷 중 하나를 차지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앞에 누가 앉아있던, 옆에 누가 눈길을 주든 무슨 상관이랴. 이 언덕은 150년 전이나 100년 전 아니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너무 빨리 성장한 탓인진 몰라도 세대 간의 단절이 두드러진 우리 삶에 비교하면 보기가 좋다.


바다 주변에는 거의 잔디밭이다. 가족들이 함께 바비큐를 해 먹으면서 휴일을 즐긴다. 유람선도 크루즈도 화물선도 다들 제 필요대로 조용히 또는 보트처럼 물살을 가로지르며 파도를 만들어 내기도 하며, 해변 옆 잔디밭에선 닭고기 바비큐를 낯선 이방인에게도 다정하게 권할 만큼 여유를 가지고 소박한 삶을 즐기며 산다. 무슨 욕심을 더 부릴 수 있을까. 그저 함께 빵 한쪽에 차 한잔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하고, 가족과 친구가 있어 감사하다고 이들은 말하는 것 같다. 함께 온 동료들도 있지만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났다. 함께 차를 나눌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다음엔 꼭 그리하리라 다짐하며 가슴으로 더 담아가련다. 


언덕 아래로 비석들이 즐비하다. 죽은 자에 대한 이유 없는 두려움이 있는 우리나라와 사뭇 다른 풍경이다. 이 언덕에 묻힌 이들은 결코 외롭지 않겠다. 꽃망울이 참았던 눈을 비비고 움터오는 봄이나, 올라오느라 땀 송골송골 맺힌 이마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 불어 식혀주는 여름이나,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봐주기 때문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내려가는 언덕길에 세월만큼이나 사라져 가는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자리 잡고 영면을 즐긴다.


피에로티 언덕에서 내려가는 길, 피에로티 언덕에서 바라보는 골든 혼


공항이다. 엊그제 도착한 것 같은데,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고 귀국길에 오른다. 0시 45 분 인천향해 출발편, 짐 부치고 출국심사 끝내고, 게이트 앞에 앉는다. 이스탄불을 하루에 본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지만 일정을 잘 짜서 웬만한 곳은 다닌 것 같다. 아침 8 시부터 걸어 다녀 고생한 발은 기내에서 편히 쉬도록 해주면 된다.


벌써 오후 세시가 다되어간다. 한 시간이면 인천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며칠 전 느꼈던 대로 이번 여행은 진짜 몽환끼가 있었는 듯, 터키에 있을 동안은 찌들며 바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삶이 언제 그런 때가 있었냐 할 정도로 아련했었다. 그러더니, 오는 날이 더 가까워질수록 마치 안개가 걷히듯이 한국에서의 삶도 현실로 가까이 다가왔다. 터키 여행은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누린 시간이랄까. 시공을 같이 느끼며, 역사 속에 내가 살았고 남겨진 역사의 흔적 속에 또 서있었다. 이제 당장 내일부터 다시 바쁘게 돌아가는 삶을 되풀이할진 몰라도  생각했던 것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해나가고 싶다. 오랜 시간,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일도 실천해야 한다.



터키 기행기를 마치며 2021.06.09


김영하 작가의 말대로 작가가 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그것도 독자를 위해 쓴다는 것은..)수명을 단축시킬 만큼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브런치작가가 되고 보니, 곱으로 이해가 되는 마음이다. 차분히 수정하고 정리하며 쓴다고 했지만 2021년 6월 지금도 풀지 못한 많은 것들이 그대로 쌓여있는 듯하다. 어찌 수천 년의 다양한 삶의 흔적을 몇 편의 글로 나타낼 수 있으리오. 문득 "만약 지금 다시 2013년 6월 3일 오늘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보니, 8년 후의 나의 미래 "오늘, 지금"이  당시 생각했던 미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싶다. 지난 시간의 여행기를 쓴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들 때도 있지만, 나의 관점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진 않았다.  


2013년과 2021년을 어우르는 마음으로 글을 쓰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언젠가 달라지리라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 사람은 변하기도 힘들지만, 즉시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는 무궁한 가능성이 있는 창조물이기도 하다. 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바탕이 이기심에서라면( 물론 그 이기심은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려는 개척의 이기심이겠지만... ) 억지로 변하려 노력하지 말고, 가진 성정을 다듬어가며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여겨진다. 수천 년을 이어온 터키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흔적들을 통해 살았던 사람들, 살아갈 사람들 그리고 살아있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해 보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주어진 오늘을 소중하게 담아본다. 



p.s.  2013년 6월 여행 시, 갤럭시 노트 1로 기록했던 기행기를 2021년 6월 수정하며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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