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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Mar 06. 2024

칙칙폭폭 대추차를 만들며...

대추차가 이리도 맛있는지는 몰랐다.

사랑과 정성의 양념으로 끓여 으스러진 몸뚱이에 뼛조각만 남기고 육신의 껍질까지 바쳐진 아이라 그런가?


어느 날 동생 친구가 정성스레 싸다 준 대추는 오감의 식이에서 관념을 하나 더 얹은 새로운 식이 지평을 열어 주었다. 뒷마당의 대추나무는 많이 달리지도 않고 그나마 초록으로 여물면 싱싱하게 아삭거리는 맛으로, 몇 알 되지 않는 대추는 아이들과 나눠먹곤 했다. 대추를 보면 먹어야 늙지 않는다는 말 때문이라도 따먹게 되는 대추 기에... 얼굴에 주름 생기는 것도 신경 쓰이는데  유독 쭈글거리는 몸매로 각인시키긴 싫었는지 우리 집 대추는 그렇게 늘 청대추로 세상을 하직하곤 했다.


대추는 태어나서 한 계절을 오롯이 즐기다가 산채로 늙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삶과 비슷하다.

많은 실과가 젊은 청춘을 우리에게 바치는 것과 비교하면 늙어서야 제 가치를 빛내는 대추의 삶은 유독 인생과 닮은 것 같다. 아삭거리는 청춘의 맛도 좋지만, 대추의 유용성은 말라 쪼글거려진 몸에 있으니 오히려 신비하기까지 하다. 끓임 없는 노력으로 인생의 황혼기에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분들의 삶, 대추 같은 분들 아닐까 싶다.


맛있는 대추차를 먹으면서 예전에 읽바빠 끝을 "마스터스 오브 로마"시리즈를 다시 시작한다. 오래전에 읽었던 "가시나무새"의 작가 "콜린 맥컬로"의 역작이다. 총 7부작 22권의 방대한 역작으로 로마공화정 말기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까지의 역사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로마역사는 예전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시리즈와 "로마사"(하이켈하임)등 여러 책을 읽으며 많이 접해왔지만, 이 책은 다른 책보단 훨씬 실감 나며 직접 로마인들의 생활에 들어가 움직이는 느낌까지 준다. 1990년에 1부 "로마의 일인자"  2007년에 7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끝으로 완성되었다. 각자가 느끼는 바가 다르겠으나, 대추이야기를 하면서 콜린 맥컬로가 떠오르는 것은,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진국, 알차게 녹여낸 대추 같은 삶의 느낌이 들어서다. 그는 30여 년을 아니, 평생을  역작을 위해 바쳤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후배가 일러준 대추차를 만드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해 본다. 대추를 깨끗이 씻은 후 압력밥솥에 충분히 물을 넣고 끓인다. 압력밥솥의 밸브가 20~30분 정도 칙칙 거린 후 김이 빠질 때까지 둔 후 뚜껑을 열어 푹 물러졌는지 확인한다. 원하는 양대로 물을 붓고 다시 한번 끓여도 된다. 나는 두어 번 반복한 후에 주걱으로 으깨어 보고, 물이 줄어들었으면 넣은 완전히 으깨어질 때까지 끓인다. 대추차보다는 대추죽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만, 각자의 취향대로 조절하면 된다. 충분히 물러진 대추차는 완전히 으깨어(껍질도 포함된다), 씨만 버린 후, 원하는 농도로 맞춰 드시면 된다(걸쭉할 있으므로 마신다는 표현보다는 먹는다는 표현이 적합할 듯하다).


이렇게 몇 번을 끓여 먹으니 감기 없이 겨울도 지나갔고 식구들 모두가 대추의 새로운 맛을 알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한번 더 만들어질 정도의 대추가 남아있다. 꽃샘추위가 오면 만들어 먹을 요량이다. "칙칙폭폭"소리와 함께 뭉근하고 맛있는 인생의 향기를 음미하면서 로마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뒷마당의 대추도 뽀족거라며 새 가지가 많이 올라왔다. 얼마나 많은 대추가 달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얼굴의 대추를 알고 나니 더욱 정겨운 대추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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