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칠지화 나무
간밤에 한파가 온다고 해, 며칠 전에 사다 심은 상추와 토마토 등, 채소 모종 심은 것이 냉해를 입을까 봐 걱정이 됐다. 이웃 지인에게 물어 왔더니,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늦은 밤에 나가 보니, 날이 찼긴 찼다. 그래도 뭐 어쩌랴 덮어 주면 연약한 잎들이 부서질 테고...
평소의 농사 철학(?)대로 " 살 놈은 살고, 갈 놈은 가고.." 들어와 나는 편히 잠든다.
아침에 걱정이 되어 마당에 나가보니, 날이 제법 추웠다. 그런데 햇살을 받으며 오들오들 떨면서도, 활짝 웃고 있는 얘들이 너무나 반가웠다. "밤새 추운데 고생 많았다" 껴안아 주고라도 싶은 심정이다.
앞으로 꽃샘추위가 몇 번 더 올지 모르지만, 견뎌주길 바랄 뿐이다. 이미 심은 녀석들을 어디 옮길 데도 없다.
슈퍼에서 항상 구입할 수 있었던 채소들이 온실 속에 자란 것 들이란 건 알았지만, 상추 한 포기 키우는데도 쉽지 않다는 것을, 키워보니 알겠다.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뭐든 쉽게 말할 건 아니다.
"그래.. 타고난 생명을 내가 어떻게 하며, 네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땅발을 받고 제법 짱짱해진 채소들을 보면서 제 몫을 할 때까지 잘 자라줄 것을 바라보며 걷는다. 결국 얘네들 잘 키워 건강한 채로 가족의 식탁에 올리려는 것인데, 어찌 보면 야박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단순 무식해 보일 진 몰라도 먹고, 자고, 그리고 내보내고, 그것의 연속이 "살아가기" 어쩌면 "살아내기"다. 가장 원초적인 숙명에 순응하기 위한, "이어짐"을 계속하기 위해선 해내야 하는 것들이다. 아니, 자연적으로 해내진다. 굳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조건 이란 말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
이 이어짐엔 반응을 해야 한다. 마당의 모든 초목들은 계절에 반응한다. 도체다. 심하게 가물면 말라죽기도 하고, 이런 봄기운엔 뭐라도 심기만 하면 제 역할을 한다. 반응할 줄 아는 것이다. 자연은 도체의 운명을 가지고 산다.
우리 집 마당 한편에 떡하니, 죽은 칠지화 한그루가 버티고 있다. 심은지 2년 된 나무인데, 죽은 지도 2년 된 것 같다. 재작년 가을 어느 주말에 와 심었는데, 심고 한달 내내 미동도 없어, 의심했건만, 더 두고 보라는 파신 분의 말씀대로 두고 봤지만 지금껏 저 모습 그대로다. 몇 군데서 가지를 꺾어보니 말랐다. 죽었다. 부도체가 된 것이다. 그래도 죽은 나무에서도 곁가지 나온 걸 본 터라, 지금껏 두고 본다. 신기한 것은 얘는 확실한 부도체인데도, 이상하게 우리 마당에 잘 어울린다. 뽑아내고 그 자리에 대체할 다른 나무가 없기도 하고, 어쩌면 그 속에 큰 바위 같은 것이 있어 뿌리를 못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싶어, 그냥 둔다. 환한 봄꽃을 피우는 나무들 속에 마른나무가 있는데도 별로 어색하지 않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이다. 당분간은 그냥 둘 예정이다.
문득 나는 도체인가 부도체인가 자문해 본다. 살아오는 동안, 반응하는 도체였던가. 별로 그렇지 못했던 것 아닐까. 도체보다는 누군가의 간절한 열망에도 냉담했던 부도체로 살아온 시간이 더 많지는 않았을까.
이 명제는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고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운명이며, 공생하며 살아가는 모든 자연의 숙명이다. 자연 속엔 도체도 있고 부도체도 있고, 반도체도 있다. 오직 사람만 도체고, 부도체로 선이 그어지는 것 같다. 물론 반도체도 있지만... 열망하고 바라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도 한다. 움직이지 않는 부도체를 향한 열정이 그칠 줄 모른다. 때론 자신을 망치기도 한다. 쌓아가는 욕심들의 끝은 부도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쌓은 들, 도체가 되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쌓아간다. 이것이 부조리다. 끓임 없는 부조리의 순환에서 벗어나고 잠시라도 숨을 돌릴라 치면, 해 질 녘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모순이다.
사람에게만 부조리가 있다. 아니 어쩜 문화가 발달해 감에 따라 우리와 함께 하는 반려동물들에게도 있는진 모르겠다. 얘들도 우리와 살면서 자기네가 동물이라고 생각 않는 경우도 많다. 반려물물을 키워본 사람들은 다 느낄 수 있으리라. 어느 순간엔가 이미 우리와 같은 자리에 앉아버린 강아지와 고양이들의 모습을... 독점이 무엇인지를 배운 것이다. 주인을 온통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행복감을 느낄 것처럼 치댄다. 사람들과 함께 산 덕에 욕심이 무엇인지를 배운 것이다.
매달리는 도체와 꿈적 않는 부도체의 운명, 끝이 없는 평행선. 그 부조리에 눌려,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그에 대응하며 도체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도 있고, 적당히 반도체로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으론, 우리 인생에 도체만 있다면 어떻겠는가... 모두가 나를 이해 주고 나와 통하며,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이 없기에 유토피아를 그리기도 하겠지만, 부도체가 없다면 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실패하고 나를 외면하는 부도체들이 있기에 더 삶에 애착을 가지고, 도전하지도 않겠는가?
오늘도 이 도시에는 많은 도체와 부도체들이 서로 부대끼며 바쁜 하루를 보낼 것이다. 누가 더 도체인지, 부도체 인지도 모르지만, 마음속엔 어쩌면 모두가 도체인 양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 안의 작은 일 하나로도 도체가 되기도 하고, 부도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반도체가 되는 걸 배우기도 한다.
파란 하늘과 막 물오르는 신록의 계절, 볼을 때리는 차가운 봄바람도, 봄의 신비를 사랑하는 도체의 마음을 차단할 순 없다. 어우러진 마당의 봄기운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깨워준다. 오늘도 적당한 선에서 도체와 부도체의 운명을 즐기는 반도체로써 하루를 나는 잘 보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작은 정원의 자연은 끊임없이 나를 끌어당기고 반응해주는 온전한 도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