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꽃나무도 목련도 꽃이 먼저 핀다.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렸다. 꽃들이 힘들진 않았는지 확인도 하고, 운동도 할 겸 마당에 나간다. 가랑비가 살살 뿌리고 있다. 고맙게도 튤립은 멀쩡하고 수선화 한 녀셕이 부러져, 식탁 꽃병에 꽃아 둔다. 어제저녁에 두 송이를 꺾어 꽃병에 꽃아 보았다. 목대가 부러져 집안으로 들어온 이녀셕은 이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때다. 수선화는 봄의 전령답게 커다란 꽃 몽우리를 일찍도 피우기 시작한다.
"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가여운 넋은 아닐까..."
김동진 선생의 가곡 수선화(시는 김동명 선생)를 열심히 따라 부르던 생각이 난다. 이제 수선화를 직접 키우다 보니, 노랫말의 의미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수선화는 겨울을 의지로 견디어 낸 것이다. 정원에서만 보던 꽃을 꽃병에 꽃아 두니 이것도 새롭다. 정원의 나라 영국에서 마당의 장미를 잘라 집안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서 부러웠는데, 나도 작은 사치를 부려 본다. 마당에서 밤낮으로 살 수도 없으니, 더러는 집안에 놔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제 아침도, 오늘 아침도 같은 듯싶지만, 다른 일상이다. 예민하게 보고 느껴야 하루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다람쥐 쳇바퀴도는 인생 같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있다. 잠시라도 시간적 여유가 생긴 지금에서야, 조금씩 이게 여유를 누리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모든 게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나무도 옮겨 다른 곳에 심으면 몸살을 한다. 하물며 사람이야. 원하던 원치 않던 바뀌어진 인생이 펼쳐지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사람에 따라 길게도 혹은 금방 적응하기도 한다만, 뭐가 좋고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저 한편으로 선을 긋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둔한 내가 얻은 경험치다.
"환자들의 받아들임"이라는 단어를 치니, 죽음의 5단계라는 표현이 나온다. 5단계는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으로 나오는데, 굳이 죽음의 5단계라는 표현을 안 써도 될 것 같다. 살다 보면 일상에서 늘 겪는 일이 아니던가. 결국엔 포기하고 "내버려 둬라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게 우선이다" 라고 결론 내린 경험이 많지 않은가. 받아들이고 나면, 끈질기게 매달리고 애달파한 그 순간만 남을 뿐이다. 그러니 "내일 하지, 내년에 하지"를 계획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스페인인들처럼 "마냐나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왜 하냐.. 내일 하지 뭐)"를 몸으로 적용한 여유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주어진 '이 순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고맙고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고마운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에게 행복한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마냐나"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작더라도 마당 있는 집에 사는 것은 축복이다. 좋아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마당은 다양한 삶을, 작게 축소시켜 놓은 공간이다. 사계를 한번 겪어 보면,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게 됨음을 경험한다. 마당에 있는 화초는 모양도 다르고, 성정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 원하는 초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잡초들이 때로는 더 번성하는 것이 마당이다. 마당은 틀이 없다. 다 각각인데, 조화로워 보인다.
열매를 많이 맺으면서도, 풍성하고 소담스러운 소출을 주는 나무도 있고, 한두 개 달랑 내주면서도, 보잘것없게 열리는 나무도 있다. 그렇다고 뽑아 버릴 수도 없다.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적다고 나쁜 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맞는 삶, 행복한 사람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이다. 외적인 영향의 세뇌에서가 아니라, 내면의 자아로 만족하고 행복을 느낀다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어쩌면 비교했기 때문에,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할 것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 비교 때문에 개인의 역사나 인간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옳다 옳지 않다 논할 필요도 없다. "난"대로 "생긴 대로 사는 것"이고, 만족되지 않는 삶은 만족하도록 노력하던지, 돌이켜서 새로 도전하면 된다. 각자의 성정대로 하면 될 것이다.
팥꽃나무와 주변 나무
팥꽃나무는 팥 같은 꽃을 피운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팥보다 작은 꽃을 피우면서 작은 기쁨을 준다. 마당의 나무나, 꽃들이 윗집에 비해 잘다. 왜 우리 집은 더 풍성하지 않을까 바라는 건 욕심이다. 윗집은 거름과 비료를 많이 주고, 땅에 투자를 여러 해 했다. 이제 겨우 비료 조금씩 주기 시작한 땅이 오히려 몸살 나지나 않을지 염려해야 한다. 그동안 빈약한 땅에서도 비교하지 않고, 자기들의 역할을 계속해 온 초목들에게 고맙다.
마당에선 삶과 죽음이 늘 공존한다. 피고 지는 것들의 연속이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피기도 힘들지만, 지는 꽃을 칭송하는 시가 없듯이 꽃이 지는 모습은 예쁘지 않다. 하지만, 피려고 애쓴 모습부터 지는 꽃잎을 처음으로 다 보게 되니, 떨어지는 꽃잎도 예사롭지 않다. 꽃으로 살다 죽으니, 잎을 내보내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는 명제를, 자연은 매 순간 실천한다. 화려한 꽃도 중요하지만, 내년에 꽃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잎도, 중요하다. 이제 마당에 꽃들은 쓰러지지만, 작은 잎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니 꽃이 진다고 애석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꽃은 지 면서도 잎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여린 잎을 내보내며 새로운 기쁨을 주는 것이 "지는 꽃"이다.
그렇게도 힘들게 꽃을 피웠던 자목련도 커다란 꽃잎이 누렇게 뜨더니, 떨어지기 시작한다. 떨어지는 꽃잎도 치우지 않고, 두고 본다. 달려있는 잎들이 지저분하다. 다른 꽃에 비해서 화려하게 컸기 때문이다. 그 사이로 푸른 잎이 나온다. 얘네들은 내년에 더 큰 꽃송이를 맺기 위한 거름이 될 것이다. 목련 나무에 삶을 투영해 본다. 한 인생을 볼 때 언제가 아이였고, 청년이었고 지금이고, 더 나이 들어 가리라, 굳이 알려 애쓸 필요가 없다.
한그루 목련 나무가 자라듯, "지금"속에 아이와 청년과 어른과 노년의 모습이 어우러져 있는 게, 여기 서있는 내 모습이다. 누구라고,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마음속에 들어있는 오직 사람과의 끈끈한 유대감을, 조금씩 자연과, 이상과 꿈을 위한 유대감으로 조금씩 녹혀 스며들게 하는 것이, 익어가는 삶이 아닐까 싶다. 비 개인 마당에서 가족들이나, 이웃들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주는 팥꽃을 닮고 싶은 마음이 드는 아침이다.
꽃잎이 지고, 여린 잎이 나오는 목련과 살구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