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브런치 책을 발간하고 나니(아니 책이라는 이름으로는 처음이다), 홀가분한 마음도 들지만 뭔가 텅 빈 느낌이 든다. 채우라는 욕심보다 뒤돌아 보라는 소리가 들린다. 이전에 브런치에 대해 올라와 있던 인터넷 글들이 생각난다. 어쩌면 같은 길을 밟고 있기 때문일까? 책은 발간했는데, 잘한 건지 모르겠다 읽는 사람은 없다 는.. 등. 책을 쓰는 것이 소망이었고, 그동안 써 놓았던 내용들을 브런치에 옮기면서 한 달을 정말 바쁘게 살았다.
글을 읽는 사람 "독자"에게 뭔가를 줄 수 있어야 "작가"라고 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라도 작은 즐거움, 쉼을 줄 수 있는 글을 써 보겠다는 작은 소망으로 꾸준히 열심히 즐겁게 썼다. 그런데 막상(글 쓰는 사람들은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아주 전문적인 훌륭한 작가들은 모르겠지만..) 쓰다 보니, 남에게 공감을 주는 글 이전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글이라도 버릴 것이 얼마나 많은 지를 깨닫게 해주는 고마운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많은 작가들이 쓴 것을 읽어 보면 볼수록, 마음에 와 닿게 잘 쓴 글이 많다. "어쩌면 이렇게 꼭 집어 잘 썼을까" "이렇게 디자인을 잘했을까" "이렇게 재밌게 쓸 수도 있겠구나..." 여러 생각을 가지며, 글을 읽는다. 진지하게 잘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읽고 공감해주는 글들이 있고, 필요가 무엇인지를 잘 꿰뚫어 써 내려간 글도 많다. 비슷한 소재라도 표현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글도 많다. 거기에 비하니, 나의 글은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 같다. 부족한 점은 많지만, 마음은 즐겁다. 이런 창구를 통해 쓰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고, 퇴고와 정정을 통해 배워가며, 창작의 기쁨도 느끼게 되니 고맙기도 하다.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은, 나이 들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때로 타인의 삶까지 책임져야 할 때 그 무게를 더 느끼게 된다. 때때로 그 무게가 시지프스의 돌처럼 힘들게 해도, 군중 속의 고독을 삼키면서 웃으며, 살아가는 게 현대인의 삶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현대인은 "사회적인 욕구"를 가지고 산다.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역할을 하고, 인정받고, 공감을 얻고 싶다는 욕구다. 홀로 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글로 써내는 것도 사회적인 욕구의 일종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해야 공감을 얻을 수가 있을까. 사실 이것처럼 부조리한 말이 없다. 작년 봄, 마당 한편으로 꽃이 핀 홍도화 두 그루를 사서 심었다. 붉게 물든 꽃이 너무 예뻐서, 작은 아이 두 그루를 심었다. 똑같이 붙여 놓을 수 없어 나눠 심었는데, 지내다 보니, 한그루는 햇빛이 좀 잘 드는 쪽이었고(대신 바람이 많이 드는 곳이다), 한그루는 햇볕이 조금 덜 드는 쪽으로 심게 되었다. 햇볕이 제법 잘 드는 쪽은 바람이 센 곳이라 좀 늦었긴 했어도, 이제 빨갛게 몽우리가 약간씩 벌어지려 한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죽진 않은 것 같은데, 도무지 싹을 키울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더 두고 봐야겠지만, 같은 나무라 하더라도 어디에 심었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서 다르긴 하다. 바람도 더 받을 수 있고 햇볕도 덜 받을 수 있다. 지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무도 이런데, 하물며 "자유"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어찌 뜻대로 얻을 수 있으랴.
봄이면 이것저것 심고 싶은 것이, 조그만 마당이라도 가진 사람들의 욕심이다. 박태기나무를 한그루 구해 심다가, 땅속에 돌이 들었는지 그만 삽자루가 부러졌다. 힘에 부쳐서였을까... 속상한 생각도 들었으나, 삽을 버리려다, 나무 파신 분의 말씀이 생각났다.
"지지대 꼭 해주세요"
"잘 잡아 주시기만 하면 잘 살 거예요"
"그래, 이걸로 지지대를 해 볼까?" 나무 심은 후에 삽자루로 지지대를 하니, 이게 딱 맞게 힘을 받았다. 생각에 따라 작은 전화위복이 된 거다. 삽이 부러진 건 속상했지만, 부러진 삽도 쓸모가 있었다.
매사가 다 맘에 들 수도 없지만, 하잘것없는 것도 없다. 그것만 인정하면 된다. 모든 것이 쓰임새가 있게 난 것이고, 참된 마음(誠)은 흐르게 되어 있다. 그 흐름이 누군가의 마음으로 흘러갈 때, 순간이라도 공감하고 인정도 하면서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러진 삽자루가 지지대로 새로 난 것처럼, 누군가의 따뜻한 글 한편도 누군가에겐 지지대가 되어주지 않을까...
어제 바람이 몹시 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잔잔하다. 바람만 분다면 어떻게 살겠는가. 바람만 불면 어떻게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겠는가. 바람 속에서도 햇살이 비치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다. 햇빛 좋은 오늘 아침, 나는 내 삶의 작은 철학자가 되어, 각자 생겨난 모양대로 누구라도 지혜롭게 극복하고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 태어난 마당 위의 "작은 생"들을 바라본다.
튤립은 겨울이라는 세월을 땅속에서 맨몸으로 견디어 내고, 이른 봄에 올라와 아름답고 풍성한 꽃을 피운다.
"이 겨울을 내가 견디어 내었노라" 꼿꼿하고 당당하고 화려하게 핀다. 그리곤 빨리 진다. 한 녀석은 바람에 목대가 부러졌다. 할미꽃은 늘 한구석에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런데 어느새 풍성히 퍼져 있었다. 옆에 보니 또 다른 녀석을 키워 냈다.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저 수그린 채로 몇 주를 가는 것 같다. 있는 듯 없는 듯.
봄마당이 아름다운 것은 이런저런 개성을 가진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섞여 있어도 서로 어울리고 조화롭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않은 것이다. 의도하지도 않았다. 저 "난대로" 견디고 살아냈을 뿐이다. 할미꽃은 할미꽃이고, 튤립은 튤립일 뿐이다. 끊임없이 양분을 섭취하고, 저마다의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봄마당 한편에 나의 "브런치"를 정성껏 심으면서, 어떤 꽃을 피우게 될 진 몰라도 모진 바람이나 가뭄과 추위에도 잘 견뎌, 굳건히 뿌리 내리기를 소망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