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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마자 지는 꽃이라도 나는 좋아라

비 오는봄날 아침.

by opera




어제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도 않고 얌전하게 아침까지 내리고 있다. 나는 싫어라 해도 초목들은 좋아할 비다. 하지만, 마을 언덕길에 활짝 핀 지 일주일도 안 되는 벚나무들이 내리는 비속에서 꽃비로 거들고 있다. 환하고 예쁜 그 모습을 일주일도 자랑 못해보고 떨어지고 만다. 이제는 열심히 잎을 틔우면서 내년을 기약하겠지.


아침 마당을 돌아보는데, 작년 4월엔가 사다 심은 작은 홍도화나무 두 그루 중 한 녀석은 죽은 것 같다. 붉은 가지가 조금 올라오긴 했는데, 꽃 몽우리 작게 맺힌 것들이 틔울 생각도 않는 듯하다. 그래도 두고 봐야 한다. 죽은 녀셕도 일 년은 두고 보자는 게 내 신념이다. 옆가지에서 새순이 나기도 한다.

죽어 보인다고 다 죽은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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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의 모진 바람과 추위를 못 견딘 건가? 안쓰럽고 미안한 생각이 든다. 바람이 워낙 센 동네다.

나무든 꽃이든 심을 때의 나의 신조는 "살 녀석은 살 것이고, 죽을 녀석은 죽을 것이다" 애지중지 키우다 말라죽고, 썩어 죽여 버린 분들을 많이 보내 본 경험에서 체념하며 심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속으로는 누구보다 "잘 자라고 뿌리 잘 내려라"하고 있지만. 뭐든지 떠나보내는 고통은 아프기 때문에 연단시키는 것이다. 간다고 안 들여올 수는 없으니... 매일 부대끼고 산다고, 안 보고 단절하고 살 수 없는 인생처럼...


기특한 녀석들도 많다. 대문 옆에 자그만 앵두나무는 가지치기를 안 해주니까 뻗어나간 가지 하나마다 곤봉처럼 꽃이 환하게 매달려 있다. 우리 동네 벌들이 제일 애장 하는 나무가 아닌가 싶다. 조그만 덩치에 꽃에, 벌에 제 몸뚱이 휘어지는 것 생각 않고 달고 살고 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제 몸을 내어준다. 물론 앵두도 많이 달린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슬처럼 방긋 맺었네" 노래 가사처럼 정말 셀 수 없이 많이 달린다. 그래서 다 따먹지 못하고 떨어진다. 가치 치기를 해줘야 나무가 실하고 굵어진다고 말하시는, 동네 어르신은 집안 나무는 물론 공원 나무까지 싹둑싹둑 자르셨다. 굵고 실하게 키우신다고... 조경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그래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키우려 한다. 자기들도 살려고 나왔는데..


자목련은 이 삼주를 거쳐 조금씩 잎을 벌려간 것 같다. 이번 주에 겨우 핀 녀석은 피자마자 꽃잎부터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이러려고 그렇게 힘들게 세상에 나왔니?" 꽃잎이 벌어지면서 자홍색도 약간씩 바래지고 윤기도 떨어지고, 거의 초췌한 모습으로 피더니, 그나마 꽃잎을 떨어 뜨린다. 얘는 벚꽃처럼 한주라도 버텨주려나 싶다. 어제 비오기 전 날엔 바람이 몹시 불었다. 겨울이 떠나기가 싫어 봄의 자락을 잡고 늘어지기라도 하듯이 어떤 때 봄바람은 너무 세다. 그래도 여린 가지들이 새잎을 틔우는 것을 보면 대견하다. 나 보란 듯이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관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으면 속살을 감춰 버리는 인간들에게 본이라도 보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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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도 빗속에 꽃잎이 다 떨어졌다. 다행히도 옆에 복숭아나무는 이제 피기 시작한다.

피는 녀석도 있고 지는 녀석도 있다. 피는 녀석도 내년에 꽃을 또 피울 것이고, 지는 녀석도 내년 꽃은 더 아름다울 것을 약속하며 떨어진다. 떨어지고 바람에 날아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봐주던 봐주지 안 쓴 얘네들은 자기네 몫을 하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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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 편 작년 가을에 심은 마가목의 목대가 제법 굵어졌다. 이제부터 자라야 하는가 싶은데, 겨울 눈 속에서도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는 모습에 고마울 뿐이다. 파란 잎을 내 보이면서 벌써 꽃송이를 품고 있다. 이 꽃송이들은 올 가을에 빨간 열매를 매달아 줄 것이다.


작은 정원 한쪽에 가장 기특한 녀석은 화분에서 거의 말라죽기 일보직전, "살 수 있으면 살아보든지.." 하는 마음으로 작년 가을에 심었는데, 말린 잎 하나도 안 떨어지고, 꽃 몽우리 같은 것을 그대로 매달고 겨울을 지냈다. 볼 때마다 죽었나 살았나 궁금했는데, 이른 봄에 말렸던 잎이 초록으로 펴지면서 살아났다. 맺혔던 꽃몽우리가 알알이 발갛게 터질 것 같다. 제일 기특한 녀셕이었다. 미안하게 이름도 모른다.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 녀셕이었다. 이런 녀석 때문에 봄이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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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고 새 봄이 왔는데도, 마음 청소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꽃도 나무도, 하다 못해 풀과 안 났으면 좋겠는 온갖 잡초들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봄인데, 인간만 작년보다 더 늙어가는 것 외엔 해가 바뀌어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부끄럽고 부끄럽다. 그래서 자연 속에 얘네들 사이에서 매일 배우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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