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작(국내 개봉 2008년)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았다. 개봉된지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2018년에 영화가 국내에서 재개봉되면서 최근까지 많은 팬들에게 꾸준히 회자되고 있는 영화다. 제목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첫 개봉 때도, 재개봉 때도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는 못했다. 이런 류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이다. 청소년관람불가. 상당히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며, 보고 나면 그다지 썩 기분좋지 않은 잔상을 오래 남기는 영화들이 대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는다. 그런 느낌을 싫어한다. 쉽게 말해, 보는 내내, 보고나서도 감정 소모가 심한 영화들은 잘 도전하지 않는 편이다.
영화 속에서는 실로 엽기적이거나, 잔인하기 짝이 없는 장면들이 그대로 보여지는 경우들이 많다. 영화의 전개상 꼭 필요한 장면과 장치들이겠지만 보는 이로서는 참 불편하다. 그런 감정이 싫어서 이런 영화들을 이제껏 기피해 왔는데 최근 들어 그런 영화들을 보는 것이 이전처럼 그렇게 힘들지가 않아졌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 감정들에 무뎌진 걸까. 생각해 보니 나만 일방적으로 변했다기보다는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나도 변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영화를 능가할 만큼 훨씬 더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일들이 현실에서 너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게 어떤 영화든 현실에서 본 것보다 더 잔인하고 경악스러울까 하는 일종의 배짱이 생긴 때문인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아니 영화에서도 한 번 본 적 없을 만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매일 같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뉴스를 보는 것이 더 불편하고 감정 소모도 심하다. 그런 세상에서 살다보니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연기하고, 연출해서 만들어진 영화 쯤이야 작정하고 보면 제 아무리 대단한 스릴러라 할지라도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보다 더 잔인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명성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그 영화를 이제야 볼 용기가 생겼던 것이다.
영화 '파고'의 존재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인지 그것을 넘어서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내내 고전하던 코엔 형제가 드디어 '일을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형식과 감각의 범죄 스릴러가 탄생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가 등장하고, 살인을 일으키고, 그를 쫓는 형사(내지는 그에 상응하는 인물)가 나오고, 그 안에서 이런저런 복잡한 관계와 감정들이 얼키고 설키면서, 중간중간 잔인하게 사람이 죽어나가고, 마지막에 범인이 잡히거나, 놓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대개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범죄 스릴러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러한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영화 전체의 느낌을 짧게 요약해 본다면, 신선하고, 세련됐으며, 철학적이고, 새롭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의문. 바로 제목의 의미다. 영화를 보기는 봤는데, 그래서 영화의 내용과 제목이 무슨 관계지? 대게 '제목'이란 그 작품을 한 구절이나 문장, 단어로 함축해서 표현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제목을 보면 어느 정도 내용을 유추할 수 있거나, 유추가 안 되더라도 일단 보고 나면 제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본지 나흘이 지난 오늘까지 영화는 일상 생활을 하는 순간순간 내 머릿 속에 불현듯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나는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이 제목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 나름대로 짐작하게 되었다. 코엔 형제가 어떤 의도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내 생각이 과연 그에 부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정답이라는게 있기는 할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객의 몫이고, 관객이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이 결국 그 영화의 의미이자 가치가 된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꽤 많은 노인(old men)이 등장한다. 'Old Men' 을 무조건 '노인'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구시대, 혹은 오래된 관습이나 방식, 생각들도 광범위하게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오래된 것은 좋은 것인가. 우리는 그것에 대한 다소 상반적인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선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 동방예의지국의 국민 답게 우리는 어른을 보면 먼저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대중교통에서 어른이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도록 배웠다. 어른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다. 그리고 역사를 배운다. 과거를 배워 바르게 아는 것이 미래를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배웠다. 이 모든 것에는 어른들의 연륜과 그들이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체득한 삶의 지혜, 거기서 나오는 노련한과 오랜 경험을 존중하고 공경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다소 쌩뚱맞은 등장이지만 '로버트 드니로'가 나오는 영화 <인턴>에서 주인공인은 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 하는 어른 세대의 지혜와 경험을 멋있게 전수하는 영웅같은 이미지로 그려진다.
반면에 구세대는 진부하고, 고지식하며, 개선하고, 개혁해야 할 대상, '꼰대'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한 편으로 그들은 무력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적절하게 캐치하지 못 하며, 타협할 줄 모르고 옛 것만 고집하는 소통 불능의 이미지로 대변되기도 한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그렇게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 하고 과거의 어느 지점에 머문 채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진 old man이 등장한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거듭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old man은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쫓지만 번번이 한 발짝 씩 늦고, 오랜 세월 현장에서 체득한 감과 노련함은 있지만 범인을 잡겠다는 적극성이나 의욕은 그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 한다. 본인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절대 범인을 잡을 수 없다는 한계에 자신을 가둬 두고 결국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력함과 자괴감을 영화 내내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old men은 또한 너무나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된다. 그들은 패기도, 힘도, 적어도 영화 속에서 만큼은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도 없다.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골칫 덩이일 뿐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이미지의 old men이 등장하지만 <인턴>에서 만났던 존경할 만한 영웅 같은 인물은 없다. 제목 그대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이다.
흔히 범죄 스릴러 장르를 보고 났을 때 오래도록 남는 것은 영화 속 장면 중에 특별히 잔인했던 씬이나, 영화를 보는 내내 숨죽이고, 가슴 졸였던 감정의 잔상들이다. 혹시 해피앤딩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불쾌함이나 찝찝함도 더 해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날 수록 주인공 '토미 리 존스'가 연기했던 '에드 톰 벨'의 감정이 더 진하게 내려 앉는다. 영화 내내 자리잡은 그 짙은 무력감, 허탈함, 쓸쓸함. 이 감정은 오롯이 'old men'과 연결된다. 어쩌면 현재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노인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들이 아닐까. 범죄 스릴러 한 편에서 이토록 철학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다니. 그야말로 걸작아닌가.
아, 영화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희대의 악역. 영화사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악역을 보여 준 '하이베르 바르뎀'의 연기다. 우리가 생각하는 악역하면, 아직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양들의 침묵'의 '엔서니 홉킨스'가 아닐까 싶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를 능가할 만한 악역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보는데, 이 영화에서 '하이베르 바르뎀'이 감히 그 자리를 탈환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죽을 필요는 없잖아요'. 극중 '하이베르 바르뎀'이 연기한 살인마 '안톤 시거'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참 많이 한다고 어이 없어 했다. 이것은 살인마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필요'에 의해 살인을 하는 자가 아니다. 자신이 만든 '원칙'에 의해 살인을 할 뿐이고 그 원칙은 '안톤 시거' 자신이 정하는 것이었다. 다소 우쓰광스럽게 보이기도 하는 단정하게 자른 단발 머리와 표정 없는 얼굴, 매우 급히 중요한 용무를 처리하러 가는 것 같은 걸음 걸이. 그 모든 것이 희대의 악역 이미지를 새롭게 메이킹했다.
영화 속에서 사람이 아무리 잔인하게 죽어나가도 크게 놀라지 않는 나를 보고있자니, 나와 내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세계가 상대적으로 더 두렵고 잔인하게 느껴져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