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에서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발리로 향하는 날. 어제부터 세차게 비가 내린다. 우기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공항에서의 수속이 빨리 끝나 두어 시간을 대기해야 한다. 이곳은 실내는 어디든 춥다. 냉방 적정 온도가 26도인 한국과 달리, 체감상 이곳 실내 적정온도는 18도인가 보다. 긴 옷에 히잡까지 두른 여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이 정도 실내온도가 적절한 걸까. 저런 복장으로 너무 덥지 않을까를 염려했던 것이 무안해진다.
출국장 앞에서 대기하며 한국에서 빌려온 책을 펼쳤다. 내용도 모르고 그냥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몇 권 빌린 것인데, 마침 내용이 미국에 외교관 신분으로 일하러 갔다가 10.26 사건이 터지고 나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해 버린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수십 년을 타국에 살며 고국을 그리워하는 외교관의 부인이자 시인인 주인공은 끊임없이 모국어를 그리워한다.
모국어. 내 나라의 말.
며칠간 영어와 중국어와 말레이어가 혼재된 곳에 있다가 한국 음식점에 갔을 때 한국 사장님이 건네었던 인사말. 그 편안함과 다정함.
늘 외국에 나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마도 그 생각은 언제든 원하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아니었나 싶다. 언제든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만약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나는 과연 그 폭력을 견딜 수 있을까.
마음껏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무한한 권력이자 자유다. 읽으면 쓰고 싶어 진다. 줄곧 그런 삶을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