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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라 Dec 23. 2020

아빠인 너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28주 차 어느 날 일기

임신을 하고 눈물이 많아졌다.


최근에도  번 정도 울었는데, 첫 번째는 남편이 로봇청소기 먼지를 안 치워줘서였고, 두 번째는 아이 성장 앨범을 반대해서였고, 세 번째는 빨래를 언제 돌릴 거냐고 언쟁해서였다. 물론 그 과정 중에 남편이 말실수를 해 화를 돋운 면도 있지만, 평소였다면 나도 화를 내면 냈지 엉엉 울었을 리가 없는 일들이라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특히, 유독 남편이 서운한 소리를 할 때마다 눈물샘이 펑펑 터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빠인 너는 그러면 안 되지, 하는 억하심정이 몰려왔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의연하게 웃어도 남편 앞에서는 감정 조절이 어려웠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할 생각도 없었다. '우리' 아기지만 '내' 뱃속에 있어 온갖 부작용을 나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도 억울했고, 임신과 출산이 남편에게 어쩔 수 없이 남일이라는 사실도 너무 부러웠다. 심지어 태어나서는 남편 성을 따르기도 할 건데, 이런 불공평한 과정 속에서 남편에 대한 억하심정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사사건건 "그래도 나는 임산부인데?"를 남발했다. 당연하게도 남편은 꼼짝도 못 했다. 아주 가끔, 남편이 용기를 내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냐며 한소리 하면, 벌컥 짜증을 내거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쏟기 일쑤였다. 고마운 행동들은 당연해지고 평소였음 넘어갔을 일들이 하나하나 서운해진 탓이었다.


나처럼 임신이 처음이었던 남편은 아내의 끝없는 짜증에 적잖이 당황해했다. 나도 나 자신이 버거울 때가 많은데, 하물며 남편에게는 어땠겠는가 싶기는 하다. 임신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10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무작정 참고 견딜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고, 특히나 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짜증은 그야말로 해결 방법도 없어 곁에서 지켜보기도 지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견디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나도 정말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억하심정 때문에 더 짜증이 많이 나는 것도 맞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감정 컨트롤이 어려운 상태였다. 짜증을 내고 싶어서 내는 것이 아니었고 울고 싶어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나로서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통제 불능인 상태가 되곤 했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많은 일들이, 다 별일이 되어버리는 탓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또한 지나간다는 점이다. 막달을 앞두고 되돌아보니, 여전히 남편에게 제일 서운하긴 하지만, 28주 차의 어느 날들처럼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임산부인, 배가 나날이 커지는, 내 몸이 맘 같지 않은, 호르몬에게 휘둘리는, 스스로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 같다. 좋게 생각하면 우울증으로 번지지 않고 이쯤에서 끝난 게 다행이기도 했다. 남편도 이 사실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다음에 이 시기가 다시 온다면,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그때는 좀 더 여유롭게 넘길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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