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나는 첫 여행, 태백

by 이래춘

은퇴하고 태백을 찾았다. 일주일 동안 홀로 지낼 생각으로 책 몇 권을 들고 집을 나섰다. 여행을 좋아하여 가족들과 많이 다녔지만 혼자 떠나기는 처음이었다. 30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하여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의 터전도 마련했다.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공허함이 찾아왔다. 나빠진 건강, 가장의 무게. 밤늦은 귀갓길에는 뿌듯함보다 오늘도 무사히 견뎠다는 안도와 한숨이 동행했다.


퇴직과 아울러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준비 없이 길을 나섰다. 평소 여행을 할 때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신념으로 시간 단위로 알차게 여행 일정을 짰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볼 것, 즐길 것, 먹을 것, 잘 곳을 찾아 최상의 일정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일정표대로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바삐 움직였다. 이번엔 아무 생각도 준비도 없이 떠났다. 그날그날 기분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철저히 나만을 바라보고 두 번째 삶을 준비하고 싶었다.


청정 고원 도시 태백에는 동해, 남해, 서해로 흐르는 강의 발원지가 있다.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의 발원지인 삼수령, 남해로 흐르는 낙동강의 황지연못, 서해로 흐르는 한강의 검룡소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바다로 가는 모든 방향으로 강이 흐르고 있다. 제2의 삶을 어느 방향으로 할까? 고민 중인 나에게 새로운 출발의 선택지가 모두 있는 듯하다.


태백엔 관광 명소가 많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인공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만들었다. 고맙게도 대부분 무료입장이고 주차도 편리하다. 다양한 전설도 있다. 시내 한가운데 있어 찾기 쉬운 ’황지연못‘은 욕심 많고 심술궂은 황 부자 이야기를 품고 있다. 금대봉 기슭에 있는 ’검룡소‘에는 용이 되려고 서해에서 강줄기를 따라 올라와 머물렀다는 이무기 이야기가 있다. 황지연못과 검룡소에서는 매일 맑은 물 3~5천 톤씩 솟아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지상 동굴인 ’구문소‘는 천연기념물 제417호다. 강물이 산을 뚫어 굴을 만들었다. 이곳에도 용왕을 만난 효자 이야기가 전해 온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기차역도 태백에 있다. 추전역이다. 땅속의 황금이라 했던 석탄을 실은 기차가 쉴 새 없이 오가던 화려했던 시절은 사라졌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은 분명히 나타난다. 과거의 영화는 과거일 뿐이다. 앞으로 내 삶을 어떻게 가꿀지가 중요하다. 추전역도 지금은 폐역이 되었지만, 겨울이면 눈꽃열차가 다니는 명품 관광 상품으로 거듭났다.


훌륭한 관광 콘텐츠가 있는데도 태백에 관광객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강원도에 있는 시 단위 자치단체 중 태백시만 유일하게 고속도로가 지나지 않는다. 서울양양고속도로와 강릉선 KTX가 개통되어 속초 강릉지역 관광객이 급증한 예와 반대 경우이다. 천혜의 관광자원이 있음에도 교통 인프라가 낙후되어 사람들이 드나들기가 불편하니 오는 이가 드물다. 사람도 비슷할 것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고립된 생활은 온전히 행복하기 어렵다. 퇴직했다고 집에서만 머물지 말고 여러 사람을 만나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열심히 닦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태백은 볼 것만큼이나 먹거리가 다양하다. 한우갈비, 막국수, 물 닭갈비, 옹심이 칼국수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모처럼 아무 걱정 없이 느긋하게 혼자 맛집 순례를 했다. TV에 여러 차례 방송됐던 '태백 닭갈비'에 갔다. 혼잡함을 피해 오후 네 시쯤 갔는데도 손님이 가득하다. 이 집 닭갈비에는 특이하게도 육수가 들어 있다. 면 사리와 야채를 먼저 먹고 양념이 잘 밴 닭갈비를 먹는다. 고기가 입에서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는다. 1인분 주문이 안 되어 2인분을 시켰는데 혼자서 다 먹었다. 맛집 인정!


'예수원'으로 갔다. 예수원은 미국 성공회 사제 대천덕 신부가 1965년에 세운 ‘수도 생활공동체’다. 덕항산 자락의 높은 수목으로 건물이 가려져 있어 입구에 다가가야 그 모습이 보인다.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 묵직한 고요와 이국적 건물이 신비롭다. 평일에는 일반인도 일시 방문이 가능하고, 사전 예약을 하면 2박 3일간 수도 생활을 체험할 수도 있다. 코로나19로 현재는 방문이 어렵지만, 일상이 안전해지면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한겨울이라 그런지 태백산 입구에 있는 숙소에는 손님이 별로 없다. 민박 촌 전체를 혼자 독차지한듯하다.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산바람에 오래된 민박집 방문이 덜컹거린다. 사방이 빈방이라 조그마한 소리에도 겁이 났다. 가족의 소중함이 느껴진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 그러하듯 여러 방면으로 강이 흐르는 곳, 태백산 아래에서 엄숙하게 두 번째 삶을 그려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체적인 답은 찾지 못했다. 대강의 다짐과 방향을 세웠을 뿐.


‘건강과 행복’을 앞으로 가야 할 길의 가장 큰 이정표로 세웠다. 건강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몸에 해로운 걸 알면서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다. 앞으로 철저히 건강을 삶의 1순위로 두고 살리라 마음먹었다. 다행히 금연과 절주, 꾸준한 다이어트와 지속적인 운동으로 건강한 몸을 되찾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행복하기’라고 생각한다. 건강이 우선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눈뜨면 회사 가고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나설 곳이 있었다. 지금은 감기에 걸려 며칠 집에만 있어도 몸과 마음이 시들어 간다. 주부 우울증이 이해되었다. 행복을 머언 목표로 두지 않고 일상에서 수시로 느끼며 살고 싶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는 딱 ‘3일’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은사인 설리번 선생을 만나고, 둘째 날은 일출과 일몰을 보고, 셋째 날은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 싶고 영화관에도 가고 싶다고 했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소망하는 ‘기적‘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행복은 클릭 한 번으로 새벽 배송되는 물품이 아니다. 생각을 바꿔야겠다. 없는 것보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평범한 일상을 귀한 보석으로 여기리라 다짐해 본다. 이번 여행도 내겐 소중한 시간이었다.


계획 없이 혼자 떠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어쩌면 새로운 길에 처음 나서면서 나에게 다짐을 한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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