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Microhabitat, 2017)

당신에게도 미소가 찾아왔던 적이 있나요?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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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라는 이름의 한 소녀는 집을 포기하고 여행을 나선다. 안정을 포기하고 모험을 떠난다.


여기에는 천칭의 논리가 있다. 그녀에게는,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안정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비중을 갖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천칭은 존재가 있는 쪽을 향해 기우는 존재의 천칭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 우리가 어떻게 이 천칭 위에서 존재가 있는 쪽을 가치있게 선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존재가 있는 쪽은 기울어진 쪽이다. 그래서 그쪽을 선택하는 것은 곧 우리의 삶도 함께 기울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기울어진 경사로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소유하고 있던 많은 것이 미끄러져 내린다. 존재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처럼, 존재를 선택하는 일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소유가 포기되는 일이다. 때문에 많은 것이 불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왜 존재를 선택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우리는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대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존재라는 표현이 곧잘 모종의 추상적인 실체를 지칭하는 명사처럼 쓰이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동사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엄밀하게는, '존재가 있다'라는 표현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적확한 표현은 '존재한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존재한다'라는 동사적 표현의 주어를 언제나 우리 자신으로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존재라는 표현은 다시금 추상적인 허깨비로 화하게 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


이처럼 결국, 이 '존재한다'라는 표현은 우리를 향해, 나를 향해 귀속된 형태로서만 그 정당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의 우리다움을, 나의 나다움을 강조하는 수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다시 한 번 이렇게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존재한다.'

'나는 내 자신으로 존재한다.'


이제 이 존재의 표현은 보다 선명한 질감으로 우리에게 와닿는다. 그것은 우리를 우리로서 아름답게 빛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이제 현대에 도착한 우리는, 이 '존재한다'라는 표현의 실제적 의미가 사실 '살다'라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고자 할 때, 우리는 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기를 선택할 때, 우리는 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삶에 던지는 소망의 형태로 구현된다. 소망은 가능성이다. 따라서, 존재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삶의 가능성의 표현이며, 소망의 표현인 것이다.


때문에, 다음과 같은 표현은 서두에 우리가 질문한 그녀의 선택에 대한 필연적인 대답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살고 싶다.'

'나는 내 자신으로 살고 싶다.'


이것이 왜 그녀가 기울어진 경사로 아래로 기꺼이 미끄러져 내려가는가에 대한 그 이유다.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그녀는 그녀 자신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역으로, 그녀가 그녀 자신일 수 있다면 그러한 삶은 그 어떠한 포기된 것들보다도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한 실존주의의 목소리다.


실존주의가 묘사하는 인간은 우주의 먼지다. 작은 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무가치하고 무력한 먼지에 불과하다는 비극적 사실은, 이 사실의 승인과 함께 불현듯 신비로운 역설로 거듭나게 된다.


여기에는 공간 점유의 문제가 있다. 실존주의는 언제나 공간의 문제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자신을 부유하는 외딴섬과 같은 작은 점으로 느낀다 할지라도, 그 점은 이 우주라는 공간(space) 위에 엄연하게 등재된 좌표라는 사실이 있다. 점은 그 자체로 자신의 크기만큼의 공간을 반드시 점유한다. 그리고 이 공간 점유에 대해 이 우주는 우리를 결코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잘난 점이든, 아무리 못난 점이든 간에, 우리의 공간 점유는 이처럼 우주에서 이미 허용되어 있다. 기정 사실이다. 사실이라는 것은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 우주에서 이 점의 형상으로 존재해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모양 이 꼴로 살아도 되는 것이다. 누가 허용하고 있는가?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그 허용의 증거다. 우리 자신이 이미 그 허락된 존재로서의 증거다.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허락된다. 우리의 공간 점유는 더욱더 아름다운 이취를 뿜어낸다.


태초에 어두운 공간만이 펼쳐져 있을 때, "빛이 있으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신화적인 은유는, 결국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진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바로 빛이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점은 실제로는 광원이다. 우리는 바로 그 빛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라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우리의 삶은 언제나, 더욱더, 빛난다.


이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살고 있을 때, 우리는 환하게 미소짓는다. 우리의 미소는 빛난다. 빛나는 우리의 그 미소가 바로 우리가 빛이라는 정확한 증거다. 우리는 빛나는 미소로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삶의 공간을 가득 채워나간다. 그리고 부유하는 먼지와 같은 점으로서, 다시 또 우리가 이동해 점유하게 되는 또 다른 참여의 공간 또한, 그 미소의 빛으로 가득 채워나간다.


이것이 바로 미소가 나선 그 여행이다. 표현 그대로, 미소의 여행이다.


미소는 공간을 찾아 여행하며, 그 여행 속에서 자신의 공간을 잃은 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영역에 참여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하나의 빛나는 점을, 하나의 빛나는 미소를 목격하게 되며, 그 미소는 하나의 입가에서 다른 입가로 번져나가게 된다. 미소를 잃은 공간은 다시금 미소의 빛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렇게 그들에게 미소는 다시 찾아온다.


이 미소의 재래와 함께,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기억하게 된다.

어떻게 우리는 미소와 함께 할 수 있었던가? 미소와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만큼, 우리의 삶 또한 그처럼 귀하게 대했다. 미소가 비추는 삶 속에서 우리는 귀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 자신이 귀하게 여겨지던 그 순간, 우리는 미소와 함께 했던 것이다.


자신이 귀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고유한 공간이 존중되는 것이다. 곧 우리 자신으로서의 삶이 존중되는 것이다.


이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아무리 작은 점유의 공간(microhabitat) 속에서 살아가는 소공녀라 할지라도, 아무리 비루한 먼지라 할지라도, 바로 그 먼지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은, 그리고 먼지 자신은, 엄연히 이 우주에서 부정될 수 없이 긍정된다는 것이다. 있는 것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으로 있는 것이 우리 자신으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으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다.


미소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해낸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공간을 당당히 점유하는 작은 점이었으며, 소공녀였고, 우리 자신이었다. 또한 지금도 우리는 또 다른 좌표 위에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작은 점이며, 소공녀고,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에 당당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미소와의 만남을 통해 기억해낸 것은 우리 자신 또한 지금의 좌표 위에서 당당하게 미소지어도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자신의 삶 또한 미소의 삶이 되어도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으로 살 수 있었던 미소와 함께 하는 삶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공녀의 미소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그리워하며 이를 기억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바로 칠흑과도 같은 우주를 밝히고 있던, 작지만, 작은만큼 더욱 선명한 등대의 불빛이라는 사실을 그렇게나 절실히 회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 자신의 회복은 분명하게 공간의 회복에서 비롯한다.


미소는 빚지며 살고 싶지 않다며, 차라리 빈곤한 삶을 선택한다. 빚은 우리를 우리의 소망과 다르게 흐르게 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시간의 은유다. 시간의 흐름 속에 매몰되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한다. 그런데 시간이 멈춘 자리가 바로 공간이다. 이것은 순간 속에서 일어난다. 순간은 시간 속에서 찾아진 공간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바로 이 순간 속에서 발견된다.


그녀가 집을 포기하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던 것은 위스키와 담배다. 이 두 매체는 미소가 순간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다. 위스키를 만나는 그 짧은 순간 속에서 미소는 그녀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며, 담배를 만나는 그 짧은 순간 속에서 또한 미소는 그녀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보다, 오히려 이 시간을 공간화시키는 순간의 매체들로 말미암아, 미소는 공간을 회복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이라는 공간 속에서, 미소는 그녀 자신이 된다. 미소는 미소가 된다. 그래서 이 공간에는 미소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것 또한 이 미소뿐이다.


우리가 그 꽃의 이름을 모른다 할지라도, 공간을 가득 채우던 그 향기만은 우리에게 반드시 남겨지듯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이 미소뿐이다.


미소로 존재했던 그 소공녀는 대체 누구였을까?


우리는 그녀에 대해 모른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삶에 접촉해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내지만, 그녀 자신의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녀는 흡사 도시전설처럼, 신비한 동화처럼, 상냥한 사마리아인의 우화처럼, 그저 도시를 살펴가는 한줄기의 선하고 오래된 바람처럼 소요할 뿐이다. 그렇게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향기만이 남는다.


그 잔향이 뒤늦게 우리의 고개를 들게 하여, 그녀가 스쳐간 그 자리에 시선을 머물게 한다. 여기에 미소가 있었다. 분명히, 여기에 미소가 있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속 예수의 약속처럼, 미소는 분명히 우리를 찾아왔고, 약속은 이루어졌다. 약속이 이행되었다는 부정될 수 없는 증거로서 남겨진 이 그윽한 향기 속에서,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미소가 궁금하다. 미소를 그리워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알 수 없는 익명의 향기로만 언제나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그러나 보고 싶은 우리를 반드시 찾아 살펴가는, 그 신비한 미소가, 우리는 그립다. 그리워서 우리의 얼굴 위에 그 미소를 그린다. 미소짓는다.


아아, 미소가 또 찾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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