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강의 히어로, 높이가 아닌 깊이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소니가 스파이더맨을 다루는 관점은 확실히 다르다. 이 놀라운 걸작 에니메이션을 통해 양자의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 또한 명확하게 드러나는 듯 싶다.
스파이더맨은 현대적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히어로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는 바로 중요한 하강의 감수성이 있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핵심적인 모든 것은 위가 아닌 아래에 있다'는 이해다. 마르크스가 그러하고, 니체가 그러하며, 프로이트가 그러하다.
지상을 활공하듯 달리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급기야는 우주를 유영하고자 하는 그 모든 고귀한 히어로들 사이에서, 스파이더맨은 홀로 번잡한 저잣거리를 내려다본다. 모두가 대지의 저주인 중력을 벗어나려고 비상하고자 할 때, 스파이더맨은 중력 속에서 중력을 즐긴다.
그에게 대지는 축복이며, 중력의 삶은 선물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또, 거듭해서 대지로 돌아온다. 기꺼이 하강한다. 세계로 침투한다. 삶으로 육화된다. 그렇게 짜라투스트라의 예언을 기필코 성취시킨다.
스파이더맨이 우리의 친절한 이웃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대지 위에 뒤엉켜 꿈틀거리는 이 끈적한 점액질 같은 삶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곧 우리의 대변자다. 아니, 바로 우리 자신이다. 때문에 스파이더맨을 통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스파이더맨을 특별한 히어로로 기억하는 그 이유일 것이다.
상승과 하강의 속성을 살펴보면, 우리 자신을 표상하는 스파이더맨의 의의는 더욱 뚜렷해진다.
상승은 수렴이고, 하강은 산개다. 곧, 상승은 동일성을 향하고, 하강은 다양성을 향한다. 더불어 상승은 보편이고, 하강은 개별이다. 때문에 상승은 추상적인 것을 향하고, 하강은 구체적인 것을 향한다.
보편적 진리라는 추상의 이름으로 더는 억압할 수 없게 된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노성, 대지 위에 군림하던 하늘의 장막을 찢어내던 그 외침은 현대의 문을 열어젖힌 뜨거운 몸짓이 되었고, 곧 우리가 되었다. 우리는 대지를 긍정하며, 대지의 삶에 속한 우리 자신을 긍정하는 실존이 되었다. 저마다가 대지에 뿌리를 내린 가장 귀한 꽃 한 송이였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꽃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유가 필요하다. 여유는 공간이다. 그리고 공간은 깊이다. 때문에 모든 아름다움에는 깊이가 있다.
그래서 스파이더맨은 하강한다. 하강함으로써 깊이를 얻는다. 꽃이 아름답다는 사실로 다가가기 위한 그 깊이를.
그렇게 스파이더맨은 우리의 삶으로 하강하며,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우리의 깊이로 침투해오며, 우리로 육화된다.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는 스파이더맨이 된다. 누구나 스파이더맨이 된다.
누구나 요리를 할 수 있음을 보여준 라따뚜이의 메시지나, 누구나 기타를 칠 수 있다며 노래한 라디오헤드의 목소리만큼이나, 누구나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에는 선명한 감동이 있다. 가슴에 공명되는 그 울림은 바로 자유의 울림이다.
우리에게로 하강해 우리 자신이 된 스파이더맨이 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될 자유가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될 자유가 있다.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꽃필 자유가 있다. 거기에는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다. 영화의 주인공인 마일스가 스파이더맨이 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다른 누군가의 가르침이나 허락이 아닌, 오직 스스로에 대한 신뢰일 뿐이었듯이, 우리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신뢰라는 것은 언제나 하강을 향한 용기다. 다시 한 번, 하강이다. 실존신학자 틸리히가 묘사하는 것처럼,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는 바닥(ground)을 향한 방향성을 갖는다. 존재는 높이가 아닌 깊이의 차원이며, 곧 바닥의 삶을 향해 하강하고자 하는 용기 속에서 존재는 스스로 꽃피게 된다. 하강 속에서 마일스는 스스로 스파이더맨이 되며,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이 된다.
하강함으로써 온전한 우리 자신이 되는, 또는 이미 온전한 우리 자신임을 확인하게 되는 이 방향성은 현대의 심층심리학에서 줄기차게 묘사되고 있는 원리다. 자신에 대해 정해놓은 표층적 한계를 의심하며, 스스로의 깊이를 새롭게 발견해가는 것이다. 융과 같은 이에게 이는 개성화 과정이라고 명명된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온전성을 발견하는 길이다.
심층심리학과 대극을 이루는 실존심리학에서도 이 깊이에 대한 감수성은 적극적으로 공유된다. 심층심리학이 깊이를 심리적 요소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실존심리학은 깊이를 삶의 문제에 귀속시킨다. 역설적인 깊이를 가진 삶에 스스로를 개방하는[투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삶의 온전성을 체험하며, 삶이 빚어낸 우리 자신의 온전성을 발견한다.
하강을 향한 여느 실천론 속에서나 발견되는 공통적인 지평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깊이는 곧 신비라는 것이다. 우리가 고유한 우리 자신이 되어가는 만큼, 우리는 더욱더 상호적인 연결감을 갖게 된다. 과거의 신비주의자들이 '둘이자 곧 하나'라고 묘사하는 현실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마일스가 하강해가며 들여다 본 세계의 심층적 구조 속에는 이러한 신비가 엿보인다. 마치 거미줄과도 같이, 홀로 고립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함께 연결되어 있는, 즉 불가분한 상호관계성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암시된다. 우리가 홀로 하강해갈수록, 우리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이 상호관계성의 감각은 스파이더 센스처럼 가장 깊은 직관으로 실감된다.
이러한 하강의 기제가, 정통적인 종교적 탐구의 정당한 방법론이었음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교적으로 얘기하자면 연기적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상호관계적 실재성에 대한 이해는 이미 종교라는 이름으로 갈무리하기에는 너무나 넓은 삶의 영토 위에 흩뿌려져 싹을 틔워 왔다. 다만 그것이 대지를 향한, 삶을 향한, 우리 자신을 향한 절실한 몸부림의 결과였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나 간절히 이 대지로 하강하고 싶었고, 이 삶을 다시 찾고 싶었으며, 우리 자신이 되고 싶었다. 즉, 우리는 스파이더맨이 되고 싶었고, 그렇게 스파이더맨은 우리가 되었다. 70억의 우리 자신이 되었다. 70억의 자기 자신이 되었다. 상상할 수 없던 누군가가 스파이더맨이었던 것처럼, 상상할 수 있는 누구나가 스파이더맨이다. 마일스는 보았고, 우리도 보았다.
"이 옷은 누구한테나 잘 맞는단다."
스파이더맨 수트를 마일스에게 건네며 전하던 이 대사는 스탠 리의 마지막 유언처럼 들린다. 또한, 마일스는 들었고, 우리도 들었다.
누구나 스파이더맨이 될 자유가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될 자유가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이미 자유롭다.
우리가 이미 자유롭다는 이 사실은 깊이에의 하강을 통해 증거된다. 깊이는 곧 공간이며, 공간은 곧 크기인 까닭이다. 깊이를 체험하는만큼 우리는 그 깊이만큼 하강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크기를 확인하게 된다. 때문에 가장 심원한 깊이는 가장 온전한 크기다. 그렇게 가장 온전한 크기의 우리 자신을 확인하는 것, 그것은 최상의 자유다.
이제 여기, 수트를 들고 장대한 삶의 깊이 앞에 서있는 우리가 있다. 자, 스스로를 믿고 뛰자(leap of fa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