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행복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작은 곰인형 하나가 어떻게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무수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을까?
이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이러한 무용(無用)의 행복론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행복론은 다분히 선(禪)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반드시 사라질 존재들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사는 동안 하게 되는 모든 일은 전부 다 쓸 데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를 무의미성의 문제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 무의미성의 자각은 우리를 허무주의로, 그리고 허무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된 그 반대편의 쾌락주의로 빠지게 한다.
허무주의와 쾌락주의는 둘 다 현대성의 징후들이다. 더는 그 어떤 보편적인 원리에 스스로를 위탁해 자신의 자리를 담보하는 일이 불가능해진 현대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결국 하나의 개별자로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게 된 개인이 필연적으로 호소하게 된 증세라고도 할 수 있다.
실존상담자들은 특히 허무주의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수립된 쾌락주의라는 목표가, 행복의 추구라는 이름으로 굴절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지시한다. 이 경우에 행복이라는 표현은 결국 더 강하고 더 많은 자극의 성취를 의미한다. 곧, 자신이 자극받게 된 임의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행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효율적인 성취를 위한 방법론들이 제시된다. 그 방법론들의 공통점은 유용과 무용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다. 이에 따라,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는 데 유용한 소재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반면 무용한 소재들은 더욱 빨리 우리의 영토 밖으로 밀려나가게 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무용함은 곧 죄에 다름 아니다.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자신의 무용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하며, 이처럼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고자 실상은 그 허무주의와 동일한 곳에서 야기된 쾌락주의의 원칙을 강화함으로써, 끝내 허무주의가 제공하는 무의미성만을 더욱 강렬하게 우리 삶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아주 전형적인 현대의 비극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리고 선에서는, 때문에 이에 대한 역설적 해답을 준비한다.
그것은 바로 무의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다.
어른이 된 주인공 로빈과 푸가 나누는 풍선에 대한 문답은, 마치 선문답과도 같이 이러한 이해를 촉발하는 기능을 한다.
푸: "내 풍선이 사라졌어."
로빈: "그건 원래 필요없는 거였잖아."
푸: "그래도 그것 덕분에 행복했어."
이 영화는 푸의 선(禪)적인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하고자 한다. 성취라는 목적에 있어서는 무용한 그 모든 것이 실제로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전술한 것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무의미성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필멸할 존재들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풍선처럼 사라지게 될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손에 쥐고 있던 그 풍선의 생생한 색채는 우리에게서 결코 잊힐 수 없는 그것이며, 사라질 존재의 그 찬란한 존재감야말로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는 바로 그것이다.
이 무의미성의 조건으로 말미암은 행복의 역설적 실감은 영화 내에서 거듭 부연된다. 그리고 그 실감이 향해야 할, 즉 우리가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 또한 정향된 방향성 속에서 거듭 상기된다.
로빈: "난 길을 잃었어(I'm lost)."
푸: "하지만 내가 널 찾았잖아(But I found you)."
우리는 반드시 잃게(lost) 될 우리 자신을 근본적으로 무의미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때문에 무엇을 하든 무용한 존재라는 인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푸는 말한다. 길을 잃은 너라서, 반드시 사라질 너라서, 무용한 너라서, 내가 너를 찾았다고, 너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고, 바로 내가 찾은 네가 의미있다고.
만연한 무의미성이 유일한 의미성으로 거듭나는 이 역설적 전환의 구조는 로빈과 푸의 역할이 뒤바뀌어서도 동일하게 전개된다. 그만큼 이 영화는 이 주제를 반복해서 강조하고자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잃은 푸는 걷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딘가'로 가야할 때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그 '어딘가'가 내게 와."
그렇게 멈춰 기다리던 푸는, 자신이 찾고 싶었던 그 '어딘가'가, 곧 로빈이 자신을 찾아오게 되는 현실을 맞이한다.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고, 무용한 존재임을 받아들인 채 무의미성 속에 스스로를 투여한 주체가,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유일한 의미를 회복하게 되는 바로 이 구조다.
이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무의미성의 역설적 가치를 우리에게 회복시키고자 하며, 이를 통해 무용의 행복론을 우리가 상기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로빈과 푸는, 곧 우리는 왜 의미있을 수 있었는가, 왜 행복할 수 있었는가?
풍선을 나에게 건네준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받은 풍선을 다시 건네줄 수 있는 또 다른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의미성은 이처럼 너를 발견하게 하며, 그 너를 통해 나를 발견하게 한다. 우리 앞에 다가와 있는 '어딘가'는, 바로 나와 너(I and Thou)인 인간은 이렇게 눈치채이게 된다. 인간이 우리의 유일한 의미며, 이 무용한 인간이 있는 덕분에 우리는 행복해진다.
"아무 것도 안하다보면 대단한 것을 하게 돼."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아무 것도 안함으로써, 즉 무용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영접하게 되는, 곧 우리의 유일한 행복의 이유가 되는 이 인간의 발견은 가장 대단한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영롱한 색채의 빨간 풍선과도 같이.
그리고 그렇게 무의미한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의 행복의 이유라는 사실을 이해한 인간은, 이제 스스로를 이해한 시선을 통해 삶을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잃게 될 그 무엇이고, 때문에 무의미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지만, 우리에게 반드시 다가온 그 삶이 있었기에, 그리고 우리로부터 반드시 사라질 이 삶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로빈과 푸가 기차에서 본 풍경처럼, 우리를 스쳐가며 나타났다 사라질 이 모든 것들, 그것들이 있어 우리는 행복했다. 언제라도 웃을 수 있었다. 이 삶의 일회성에 대한, 그리고 우리 존재의 일회성에 대한 가장 상냥한 시선이, 그 시선에 담긴 우리 스스로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 바로 선(禪)의 행복론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작은 곰인형 하나가 왜 이토록 커다랗고 따듯한 사랑을 담고 있는가에 대한 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