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Glass, 2019)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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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 자신이 되는 일을 억누를 수 없다(You cannnot contain what you are)."


마치 선사(禪師)나 인도의 성자에게서, 혹은 예수와 붓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에게서 들려질 법할 이 말은 이 영화를 견인하는 표어이자,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만든 모든 영화의 중추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다.


<식스 센스> 이후로, <언브레이커블>, <싸인>, <빌리지>, <레이디 인 더 워터>, <해프닝> 등을 거쳐 <23 아이덴티티>와 현재의 <글래스>에 이르기까지, 샤말란은 일관적으로 하나의 인간상만을 묘사한다. 그의 영화 속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실제로는 상호관계적으로 묘사되어 구성된 하나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 인간은 어떠한 인간인가?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묘사한 것처럼, 그것은 바로 종교적 인간(Homo Religius)이다.


그리고 이 종교적 인간이란 곧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이다.


인간이 종교적으로 되고자 하는, 곧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개념은 바로 유한성과 초월성이다. 샤말란은 이 유한성과 초월성이 상호공속적으로 구성하는 종교적 인간의 실제를 묘사하는 데 탁월한 통찰을 보인다. 그의 모든 영화는 이러한 종교적 함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기능하는 일종의 종교적 우화와도 같다.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할 때 반드시 정면으로 마주하게(encounter) 되는 것은 바로 세계다.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세계에의 인식이다. 이것을 우리는 경계(boundary)라고 부른다. 모든 세계는 하나의 경계며, 하나의 알이다. 헤르만 헤세가 묘사하는 것과 같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하나의 알은 그 알 속에 담긴 개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키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개체가 점차 자라나 그 존재감이 커져가게 됨으로써, 개체는 이제 알이라는 경계를 오히려 자신을 제약하고 억제하는 한계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한계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한다.


이것이 바로 유한자로서의 자기인식이 출현하는 순간이며, 유한자가 자신을 유한자로 만드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지향성을 담지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 기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역설에 대한 감수성이다. 유한함을 자각하는만큼, 초월에 대한 지향은 그 강도를 더한다. 즉, 더 큰 유한이 더 큰 초월을 부른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먼지이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라고 묘사하며, 선(禪)에서는 이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마음의 티끌이 곧 깨달음이다)라는 언술로 묘사한다. 역설의 성립이다.


종교성은 바로 이 역설로서만 구성된다. 종교적 인간이란 우리의 모든 삶이 이와 같은 역설적 상호관계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감수성을 가지며, 그 역설을 자신의 중심으로 받아들여 사는 인간을 의미한다.


이처럼 유한성과 초월성이 역설적 상호관계성 위에 놓여 있는 까닭에, 유한성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초월성 또한 지향할 수 없게 된다. 이 말은, 하나의 개체가 자신을 유한하게 억제하는 세계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의 가능성을 더욱 자유롭게 전개해나갈 초월적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말과도 같다. 말 그대로 역설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시자이자, 현대의 심리상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칼 로저스의 경우에는 이러한 종교적 기제를 보다 심리학적인 언어로 다시 묘사하기도 한다.


"우리가 취약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 다음에야 변화는 가능해진다."


곧, 자신을 한정짓는 하나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의 취약한 유한성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취약함으로 말미암아, 취약함에 응답하려는 상냥한 몸짓들이 우리에게서 배태되며, 그 몸짓들은 아름다운 날개짓으로 화해 우리를 비상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샤말란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 인간으로서의 발달 과정을 핵심적으로 묘사해낸다.


언제나 샤말란의 영화 속에는, 개인을 제약하는 하나의 일상적이며 단단한 경계가 묘사되고, 그 안에서 개인은 자신을 비정상의 열외자로 느낄 만큼의 유한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샤말란이 묘사하는 개인은 이 유한성을 무시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인함으로써, 결국에는 세계를 긍정하고, 자기 자신마저도 긍정해내는 도약을 이루어낸다.


샤말란이 묘사하는 인간상이 이와 같은 전환을 이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작동하는 개념은 바로 용기다. 그것은 실존적 신학자 틸리히가 묘사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용기'다. 곧,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courage to be)다.


이러한 류의 용기는 마치 투사 같이 힘세고 용감한 모종의 상태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는 곧 용기에 대한 사랑이다. 더 쉽게는, 용기는 사랑이다. 스스로를 수용하고자 하는 사랑이다. 수용(acceptance)은 실제로 사랑이라는 단어의 현대적, 그리고 심리학적 대체어다.


샤말란은 줄기차게 주장한다. 다른 이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간에, 아무리 당신을 비정상이라고 규정하든 간에, 당신만은 당신 자신을 신뢰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당신 자신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 어떤 변화도 가능하지 않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삶의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신뢰해보고자 눈을 뜨고 귀는 여는 것, 그리고 우리를 향해 다가온 상냥한 시선들을 신뢰해보고자 눈을 뜨고 귀를 여는 것, 이것이 바로 용기다. 이것이 바로 사랑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인 미스터 글래스의 입을 빌려 샤말란은 다시금 강조한다.


"당신에게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은 당신의 현실이다. 그 원인이 어떻고, 이유가 어떻든 간에,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말은, 영화의 주요한 갈등으로 기능하는, 주인공들이 한낱 망상 속에서 사는 정신장애자들에 불과한지, 아니면 정말로 새로운 인간의 영역을 개척한 초능력자들인지에 대한 모순적 대립 속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주는 언술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양쪽의 모든 관점을 수용함으로써, 그 모순을 역설로 거듭나게 하려는 전인적인 의도의 발화다. 즉, 종교적 지평을 겨냥한 의도의 황금화살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정당했고, 남들과 다른 실패작처럼 자신을 느꼈고, 때문에 무력하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더없이 증오해왔던 바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은 엄연한 현실이다. 바로 여기에, 세계로부터 최대한 부정당한 자신의 모습, 곧 최대의 유한성이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생겨난, 부정되어 깨어진 것을 다시 온전하게 붙여보고자 바닥을 쓸어 헤집던 간절한 몸짓으로 스스로의 유한성에 응답하기 위해 이룬 또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 있다. 곧, 부정당한 것을 다시 긍정하기 위한 자신의 모습, 최대의 초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처럼, 인간은 유리(glass)와 같다. 인간은 영롱하나 깨어지기 쉬우며, 깨어져 날카로운 단면에 찔림에도 불구하고 그 깨진 파편들을 끌어 안을 수 있는 품이다. 최대의 유한성이자, 곧 최대의 초월성이다.


세계로부터 부정당한 이가, 이제 자신을 부정하는 세계조차도 긍정하는, 세계보다 더 큰 이가 된다.


자신을 부정한 이가, 이제 부정된 자신조차도 긍정하는, 자신보다 더 큰 이가 된다.


이것이 종교적 인간의 실제다. 샤말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지금의 한계보다 더 큰 품,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종교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샤말란은 말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되는 일을 억누를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정확하게 다시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은 사랑하고자 하는 당신 자신을 억누를 수 없다."


사랑은 터져나온다. 자신을 부정하는 모든 경계들조차도 자신의 품에 담으려 하는, 사랑의 가장 큰 품을 개방하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그 누구도 억제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당신인 까닭이다. 우리 자신인 까닭이다.


이 우주의 최대의 실패작이자, 모든 실패작들을 다 끌어안는 우주와 같은 최대의 품, 바로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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