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의 하늘
영화관을 나와 아무 생각 없이 10분 정도를 걷다 보면, 불현듯 영화의 장면과 배우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밀려와 왈칵 하게 되는 종류의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가 그러하다.
2010년대 일본의 젊은이들의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언제, 어디에서나의 젊음의 이야기다.
젊음의 불행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최고의 자원들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된다는 데 있다.
아무 것도 갖지 않았다는 것, 늘 빈 손이었다는 것, 그래서 누군가의 손을 맞잡을 수 있었고, 지킬 것 없이 담대하게 달려갈 수 있었다는 것.
아무도 그의 편이 아니었기에, 오롯이 그의 것으로 삶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것.
아무 쪽으로든 쌓아올린 과거가 없기에, 열린 사거리에 부는 바람과 첫키스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아무렇게도 결정된 미래가 없기에, 현재에 상냥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젊은 우리는 이 최고의 자원들을 당시 이렇게 부르곤 했다.
"불안하다."
대도시의 밤하늘은 서럽디 짙은 푸른 빛이다. 그 하늘 아래, 누구도 나를 특별하게 보지 않는다. 모두가 평범하고, 죽음은 비범하다. 오늘의 친구는 내일의 주검이 되고, 누구도 듣지 않는 노래는 누구도 머물지 않는 거리에 울려 퍼진다.
투명한 밤하늘은 없다. 미래는 불투명하다. 마음은 닿지 않고, 다가온 마음은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짐이다. 그저 사랑받기를 꿈꾸며 세계를 미워하기를 택한다. 그 공허한 간극을 메우기 위한, 아무 의도 없는 메아리들은 술집을 가득 메우고, 틱 장애처럼 무력감은 돌출된다. 보호받지 못한 맨 살이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 불길한 예감이다.
무너지는 밤하늘은 소망된다. 세상이 끝장날 뉴스속보가, 내 가슴이 허물어지는 속도보다 먼저 도착하기를 꿈꾼다. 내일 아침이 찾아 왔을 때, 나만 남겨놓고 사라지는 것들이 밉다. 버려진 것들이 서럽다. 그래도 살았으면, 그래도 살아주었으면. 화장터의 재가 도시 위로 눈처럼 날릴 때, 나는 소망하였다. 그 소망 아래 고요히 꽃이 피었다. 우리의 눈동자 안에.
그리고 젊었던 우리는 이 최고의 자원들을 훗날 이렇게 다시 부르곤 했다.
"가슴이 뛰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불안과,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두려움 속에서, 모든 것이 미지인 가장 최악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가슴은 분명 뛰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알 수 없어서, 우리의 가슴은 더욱 뛰고 있었다.
우리는 미지였다.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지였다.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어서, 우리는 처음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
"고마워."라는 말을 수도 없이 전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이 세상에, 차마 없을 수도 있었던 네가 이렇게 있어주어서, 이렇게 네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고맙다고 수도 없이 말을 전했다.
우리는 서로를 기적으로 승인했다.
아무 것도 아님에도, 엄연히 있던 기적으로 승인했다.
부정할 수 없이 네가 반드시 거기에 있었다는 증명으로, 우리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너는 있었다. 있어서, 우리는 불안했다. 우리는 가슴 뛰었다. 우리가 불안한 만큼, 있었다. 우리의 가슴이 뛰는 만큼, 있었다.
있었다. 다 있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없어서, 세계는 다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우리는, 세계를 다 있게 했다.
우리의 텅빈 가슴으로 세계를 끌어 안고 있었다. 긍정하고, 또 긍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랑했다.
젊음은 언제나 사랑하는 자의 이름이었다.
이것이 젊음이 가진 자원 중 가장 위대한 자원, 바로 역설이다.
거울처럼 젊음을 비추는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푸른 빛이어서, 지나치게 서럽고, 턱없이 아름다웠다.
거울처럼 역설을 비추는 밤하늘은 항상 가장 깊은 역설의 빛깔이었다.
이 역설의 하늘이 언제나 젊음을 구원하였다.
젊음이 지난 후에도, 그 하늘의 푸른 빛은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겨져, 하늘빛을 담은 고운 눈망울을 우리에게 호출해내던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또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었던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