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은 자신을 미워할 자유다
한 여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그렇게, 불우한 인생 속에서 가까스로 찾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삶의 의미마저 잃은 그녀는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끝내는 그 고통을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나머지 여인은 죽은 아들을 안고 붓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 그러자 붓다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여,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겨자씨 한 줌을 얻어 오십시오. 그러면 제가 아들을 살려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인은 마을로 달려가 여러 집의 문을 두들기며 미친듯이 사람들에게 청했다. 그러나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여인은 간절함만큼이나 지쳐갔다. 그러던 중 한 집의 문을 두들기자 그 안에서 또 다른 여인이 나와 사정을 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은 여인은 겨자씨를 얻기 위해 찾아온 그녀와 그녀의 품에 담긴 아이를 가득 안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얼마 전에 쌍둥이를 잃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떠나 보내고는 내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집은 나와 같은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어디에도 없답니다."
이제 여인은 붓다에게로 다시 돌아와, 아이를 조심스레 땅에 내려놓고, 그 앞에 엎드려 서럽게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아이를 잃은 여인의 가슴에서 한없이 울려 퍼지는 파도소리를, 붓다는 고요히 듣고 있었다.
이 영화는 그 파도소리에 대한 영화다.
바위조차 부술 듯한 거센 물결과 흔적도 없이 사라질 물거품처럼, 밀물과 썰물처럼, 들숨과 날숨처럼, 팽창과 수축처럼, 화와 슬픔처럼, 파도소리는 이 모든 삶의 소리다. 삶의 심장박동이다. 그래서 파도소리를 듣는 우리는 바다로 이끌린다. 거기에 삶이 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 만나려 하지 않는다. 매순간을 흘려 보낸다. 그래서 헤어지게 된 뒤에야 만남이 알려지는 일은 빈번하다. 헤어짐을 낳은 바로 그것이 만남이었으며, 그 만남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를, 조금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도타기를 배우려 한다.
방관자처럼 멀리 떨어져서 파도를 바라본 뒤 이미 사라진 그 파도의 아름다움을 회의하기보다는, 파도 속으로, 곧 삶 속으로 더 간절히 참여하고 싶은 까닭이다. 산산이 흩어질 헤어짐을 받아들임으로써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온 몸으로 더 진하게 만나고 싶은 까닭이다.
파도타기는 만남과 이별의 역설적 공속물인 이 삶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은유적 방법론이다.
파도를 탄다는 것은 파도와 싸우는 일이 아니다. 파도를 이미 외적으로 간주하고, 이를 제압하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살고 죽는 자연의 섭리가, 곧 삶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죽음은 임의의 적과의 투쟁의 결과가 아니다. 곧, 죽음은 미움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미움과 관련지을 때, 여기에는 반드시 우리 자신에 대한 미움이 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 우리 자신의 무력함과 둔감함에 대한 미움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우리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 미움은 손쉽게 외부로 투사된다. 선량한 우리와는 다른 사악한 세력이, 심지어는 자연마저도 악의를 갖고 그 상실의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부조리를 어떻게든 수용해보려고 애쓴다. 악의를 가졌다고 가정되는 대상에게 책임을 묻고, 사죄를 요구하며, 나아가서는 그 대상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한다. 악의가 우리에게 수용될 수 있을 때까지, 곧 악의마저도 수용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이 자라날 때까지 버텨보는 것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자주 거리를 두기도 한다. 악의의 실체로 상정되는 대상에게서 늘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그 대상이 상기시키는 상실의 고통에 대해 초연한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물리적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마음의 시간은 흐르지 않은 채로 남는다. 곧, 고통은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
이는 수용이라는 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굴절되었기에 야기되는 현실이다. 수용은 소화와 같다. 소화된 음식물은 양분이 되어 우리의 몸 안에서 흐른다. 그래서 수용은 순환이다. 무언가가 정말로 수용되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흐름이 회복된다.
정체가 일어나는 이유는 거기에 투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실제로는 투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투쟁의 대상은 두 말할 것 없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너무나도 미운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이 미운 자기 자신을, 그리고 이러한 자신이 투사된 타자를 수용해보기 위해 결국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용은 투쟁이 아니다. 수용은 파도타기와 같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그대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곧, 자신에 대한 미움이 있다면, 그대로 자신을 미워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수용이다. 수용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너무나 미울 때, 우리는 그러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을 승인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수용이다. 그래서 수용은 미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미운 자신을 미워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워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미움이라는 파도 위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미워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의 파도를 타고 있다. 그리고 그 파도 위에서 우리의 몸을 다시금 곧추 세울 수 있다. 우리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
파도타기는 파도를 자신의 편으로 삼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미움이라는 파도에 대해 우리는 미워하지 않으려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우리의 편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미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곧 기꺼이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소중한 것들이 모두 떠나가버리고 남겨진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떠나가는 그 모든 것들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이 모든 것들을 영원히 내 곁에 둘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떠나간 모든 것들에게 영원을 선물하고 싶을 만큼, 그 모든 것들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미워한 그 크기는, 사랑하는 것들을 향한 우리 자신의 사랑의 크기였다.
그래서 붓다는 고요히 듣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여인의 가슴에서 한없이 울려 퍼지는 파도소리를, 그 영원한 사랑의 고백을, 고백하고 또 고백해도 결코 그칠 수 없는 사랑 그 자신의 무한한 노래를, 그렇게 붓다는 듣고 있었다. 지금 막, 사랑이 영원에 닿았음을 알리는, 고요한 영원의 증인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