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 스토리 4(Toy Story 4, 2019)

실존주의의 완성: 사랑으로 태어나 한없이 자유로우라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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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의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사랑에 속해 있다고 얘기되는 우리 자신이 왜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의 장난감이 된 것처럼 또는 버려진 쓰레기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가?


이 사랑이라고 가정되는 본질과, 장난감 또는 쓰레기라고 체험되는 실존과의 간극, 이것을 실존주의에서는 부조리라고 부른다. 이 부조리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이 우리를 구속하는 것으로서, 또한 쓰레기가 되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오히려 쓰레기를 자유로운 것으로서, 양가적으로 경험한다.


이는 분명하게 고전적인 신과 인간에 대한 양가적 관계의 묘사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이러한 신인(神人) 관계를 새롭게 기술하고자 하는 현대판의 신화며, 그 해석학이다.


실존주의는 결코 자유에 대한 낭만적인 서사가 아니다. 자신을 아무 제약없이 자유롭게 창조해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적인 것이며, 헤겔적인 것에 속한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바로 그러한 것들에 가장 크게 저항함으로써, 현대의 문을 열어젖힌 반동의 세력이다.


차라리 실존주의는 운명에 대한 것이다.


주인에게 복속된 장난감이 되거나, 또는 주인에게 버려진 쓰레기가 되거나, 그 운명의 틈 사이에서 고뇌하는 햄릿이다.


"장난감이냐, 쓰레기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문장을 조금 더 개념화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사랑이냐, 자유냐, 그것이 문제로다."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실존주의에 대한 첨예한 묘사다.


영화 속 우디의 모습처럼, 우리 앞에는 운명이 놓여 있다.


한 편에서, 우리는 장난감으로서 장난감의 가장 신성한 의무를 다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보다 주인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해 주인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며, 주인의 가장 충실한 노예로서 사랑받는 길이다. 이 길 위에서는 사랑받는 것이 우리의 행복의 근거며, 곧 삶의 모든 목적이 된다.


다른 편에서, 우리는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의 당연한 권리를 실현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도 살 필요 없이, 가장 편안하고 이완된 우리 자신만의 쓰레기통 속에서 자유라고 가정되는 안락감을 누리는 길이다. 이 길 위에서는 자기충족, 곧 자위가 우리의 행복의 근거며, 곧 삶의 모든 목적이 된다.


곧, 우리는 타자를 향해 전적으로 개방되거나, 타자에 대해 전적으로 폐쇄되거나 하는, 예속과 자폐 사이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운명이며, 그래서 운명은 바로 관계다. 그 앞에서 우리가 예속 또는 자폐의 양극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관계라는 구조에 대한 묘사다. 관계라는 이 구조 속에서, 우리가 장난감이 되거나 쓰레기가 되는 일은 필연이다. 불가피하다.


이처럼 이 관계라는 운명의 구조가 우리에게 양극의 반응을 유발하는 까닭에, 운명은 우리에게 모순으로 체험된다. 그리고 그 모순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것도 선택할 수 없어 고통받는다. 딜레마의 고통이다. 이 고통스러운 딜레마의 갈등 속에서 어느 한쪽을 성공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통에서 구원해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서 스스로 느끼게 되며, 그로 인해 우울에 빠진다. 현대인의 비극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결단이 요청된다. 모든 실존주의의 전통은, 그것이 키르케고르가 되었든, 니체가 되었든, 사르트르가 되었든 간에, 다 이 결단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 결단은 양자 택일을 위한 의지가 아니다. 확고하고 명확하게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결정하는 선택의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결단은 모순의 선택으로 보이는 운명 그 자체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즉, 구조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구조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더욱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그 구조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던 반대편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자신을 장난감으로만 선택해옴으로써 노예가 된 이는 그 반대편에 놓인 쓰레기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자신을 쓰레기로만 선택함으로써 자위의 요람 위에 누워있던 이는 그 반대편에 놓인 장난감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결단은 수용이다.


실존주의의 아버지인 키르케고르는 이 수용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신[운명] 앞에 선 단독자의 개념을 말한다. 단독자라는 것은 바로 독대한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도 거부하지 않고 마주선다는 것이다. 통째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대한다는 것은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앞에 서 있는 상대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곧, 결단은, 부분으로 환원시키거나, 임의로 굴절시키지 않고, 그저 앞에 다가온 통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일이다.


우디가 스스로를 이제 용도가 폐기된 쓰레기로서 받아들이게 된 순간, 포키가 스스로를 이제 주인을 가진 장난감으로 받아들이게 된 순간, 전환은 일어난다.


모순에서 역설로, 모든 것이 전환된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전환된다. 시작부터 끝까지의 모든 공간과, 모든 공간 속에서 펼쳐졌던 그 모든 사건들이, 사랑으로 다시 알려진다.


사랑이 생명을 불어 넣었고, 그렇게 사랑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생명이, 이제 자신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그 호흡의 주체보다 더 큰 호흡을 한다. 더 큰 사랑을 한다. 소중한 장난감에서 하찮은 쓰레기로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우디는 스스로를 더 큰 존재로서 다시 발견한다.


버려진 것이 아니다.


더 커진 것이다.


주인보다 더 크게 사랑할 수 있게 된 장난감이, 하나의 사랑의 원 안에 담기기에는 너무나 커진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인을 넘어서 더 큰 사랑을 하기 위해, 무소속의 영토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포키는, 쓰레기통 안의 자위로만 살던 자폐적 공간을 벗어나 더 넓은 사랑의 공간을 발견한 것이다. 곧,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기쁨을 발견한 것이다.


주인에게 속한다는 것은 장난감으로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기쁨이었다. 그리고 주인을 벗어난다는 것은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더 크게 사랑할 수 있다는 기쁨이었다.


그렇게 사랑으로 전환된 모든 것이 동시에 자유로 전환된다.


자유는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모순의 관계에 놓인 것이 아니다.


더 크게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유다. 곧, 자유는 사랑의 동사적 표현이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끝없이 확장되는 사랑의 표현이 바로 자유다.


우리를 창조했다고 가정되는 신을 벗어난다는 것, 우리를 태어나게 한 부모를 벗어난다는 것, 우리를 소중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준 연인을 벗어난다는 것, 그 모든 주인들과의 일별은, 그래서 사랑을 잃고 자유를 선택한다거나, 자유를 저당잡히고 사랑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주인보다 더 크게 사랑하기 위해, 곧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스스로를 결단하는 일이다.


사랑도, 자유도, 모두 이 결단 속에 있다. 스스로를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자로서 선택하는, 이 실존주의의 결단 속에 있다. 가장 크게 사랑할 수 있는 자의 출현, 이것이 실존주의의 완성이다. 아니 실존주의의 영원한 진행형이다. 우리는 우디에게서, 바로 이 영원한 진행형으로서의 실존주의적 인간상을 본다. 사랑으로 태어나 한없이 자유로운 자의 향기를 맡는다.


완벽이라고 생각되었던 토이 스토리 3편의 결말보다, 더욱 장대한 인간의 뒷모습을 전하는 이 영화는, 그래서 언제나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사랑하기 위해 떠나는 인간의 거룩한 모험담이며, 결코 그치지 않을 사랑의 궤적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다. 더 할 나위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할 것임이 분명한, 언제나 그 이상의 기쁨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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