쁘띠 아만다(Amanda, 2018)

여분의 실존: 엘비스가 건물을 떠나고 남겨진 것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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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는 건물을 떠났다. 그가 무대 위로, 마치 당연한 것처럼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팬들은 남겨졌다.


엄마는 이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집 안으로, 마치 당연한 것처럼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이는 남겨졌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다시 또 기다린다. 시간을 가슴에 새긴다. 우리는 이것을 애도라고 부른다.


상실의 슬픔 앞에서 공동체적으로 연대하는 일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애도의 차원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애도는 집단의 제례를 통해 가능하지 않다. 애도는 가장 내밀하고 심층적인 실존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의 개성이기보다는, 집단의 역할로서 더 주요하게 기능했던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는 물론, 한 공동체 내의 구성원의 상실은 집단적인 애도로 처리될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집단이념으로서의 전체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강조를 통한 결집은 파편적인 구성원의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라고 믿어졌던 까닭이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집단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개체적 실존이다. 이처럼 우리 각자가 고유한 하나의 실존이라는, 즉 누구도 우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불가피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의 우리는, 이 전체주의적 내지 공동체주의적 연대가 실제로는 애도의 작업을 가능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이해하고 있다.


고유성이라는 것은 우주에서 단 한 번뿐이고, 단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즉, 고유한 어떤 것은 그 자체로 우주와 대등한 크기를 암시한다. 그게 실존의 의미다. 하나의 인간은 우주만큼 귀하다. 그렇게 우리가 우주를 잃었는데, 고작해야 우주보다 턱없이 작은 하나의 경계 위에 구축된 집단 내지 공동체의 연대가 어떻게 그 크기를 포섭할 수 있을 것인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정말로 애도에 필요한 것은 자신만의 시공간이다.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또 누구도 감히 개입해서는 안되는, 자신만의 시공간을 충분하게 체험해야 한다.


실존주의 문학의 걸작 『구토』에서 사르트르는 주인공 로캉탱의 목소리를 빌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나는 어디로인가든 내 자리를 찾아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내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여분의 존재다."


여분의 존재라는 것은 남겨진 존재라는 의미다. 에덴이라는 자기 자리에서 추방당한 아담처럼, 엘비스의 앞자리를, 엄마의 옆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믿어 의심치 않던 우리는, 이제 그 자리를 잃어 이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그렇게 우리는 남겨진 존재다.


우리에게 우주만큼이나 가장 귀한 이를 잃고, 그렇게 우리는 남겨졌다. 엘비스는 건물을 떠났다. 그리고 그 건물에 우리는 남겨졌다.


그가 떠난 뒤 정말로 남겨진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정향된 애도의 물음이다.


남겨진 것은 엘비스가 떠난 건물인가, 우리 자신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한 내밀한 시공간 속에서, 여분의 실존으로서 이 애도의 물음을 정직하게 물음으로써, 이내 정확한 답을 발견한다.


귀한 이가 떠난 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더는 아무 의미없고 황폐한 건물과 빈 방이 아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그 귀한 이의 부재로 인해 파괴된 세계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살아볼 만한 세계 속에 그 귀한 이가 우리를 남긴 것이다.


우리는 남겨진 존재다. 곧, 우리는 귀한 이가 남긴 존재다. 우리는 여분의 실존이다.


왜 우리는 남겨졌는가?


우리가 상실한 이가 우리에게 우주였듯이, 그에게 우리 또한 우주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사랑하는 그를 우리가 잃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를 그가 남긴 것이다.


이렇게 여분의 실존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확인함에 따라, 잃어버린 우주의 크기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우리라는 우주가 여기에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 함께 알려진다. 오직 실존만이 우주의 크기에 상응한다.


그리고 이제, 엄마를 잃은 아이는 다시 기억한다. 엘비스는 건물을 떠났다고, 이미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남은 것은 없다고 서럽게 울던 아이는, 불현듯 남겨진 자기 자신을 다시 기억한다. 이처럼 서럽게 울고 있는 자기 자신만은 결코 부정될 수 없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한다.


그래서 '내가 귀한 엄마를 잃었구나.'가 아니다. '엄마가 귀한 나를 남겼구나.'이다.


상실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실존의 의미는 언제나 이처럼 양방향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누군가가 우리에게 우주였듯이, 우리도 그에게 우주였으며, 그렇게 우리는 우주만큼 귀한 스스로의 모습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우주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의 빛이 퍼져나가듯, 미소는 환히 빛난다. 사랑의 미소가 가슴에 가득 새겨진다. 우리는 이것을 애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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