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신성한 잡동사니
사랑과 배려로 서로를 감싸주며, 거친 북풍을 함께 끌어안고 이겨내는 친밀하고 따듯한 가족의 풍경.
어디에나 있을 것 같지만,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도 없기에, 모든 곳에 있다.
삶이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니, 모든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작은 단 하나라도 삶으로부터 결코 소외되지 않는다. 전부 다 삶 속에 담겨 있다. 삶이 가득 끌어안고 있다. 그래서 삶은 잡동사니의 산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러한 삶에 대한 묘사다.
마작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무능력한 아버지로 인해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며 곤궁한 나날을 보내는 한 가족의 풍경이 있다. 그러던 어느 저녁, 담배를 사러 다녀오겠다는 아버지는 그대로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남은 가족들은 금이 간 그 풍경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가슴에 못질을 해댄다.
어머니는 아침에 신문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얼굴에 립스틱을 짙게 칠하며 밤의 유흥가로 나가고, 형은 동생의 소풍도시락에 까맣게 태운 반찬을 설움과 함께 담으며, 동생은 불안을 그의 눈 안에 꾹꾹 눌러 닫는다.
그렇게 말로 차마 다 하기 비루한 13년이 지나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족들이 모였다. 쉽게 허용해서는 안될 진중한 무게와, 그 무게로 닫아건 마음의 빗장이 흔들리는 어색함을 얼굴에 새기며.
그리고 가족들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지난 13년간의, 한때 가족이었던 이들은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알아온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모였다.
아버지의 모습만큼이나 구질구질한, 그리고 아버지를 잃고 악착같이 살아온 가족들의 과거만큼이나 구질구질한 행색의 사람들이다. 그 구질구질한 사람들은 고인을 기억하며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을 펼쳐낸다. 잡동사니 같은 이야기들이다.
너무나 구질구질해서, 구구절절하게 가슴에 새겨지는 이야기들이고, 너무나 잡동사니 같아서, 다시 찾아낸 다락방의 보물상자 같은 이야기들이다. 웃기고 슬픈 이야기들이며, 산은 산이고 산은 산이 아닌 이야기들이다.
그렇게, 흐려진 과거의 풍경은 새로운 오늘의 풍경과 겹쳐진다. 모순의 고통 속에서 내지르던 비명은 역설의 시선 속에서 노래가 된다. 지평은 융합되고, 의미는 드러난다. 끊어졌다고 믿었던 다리가 새로이 놓이고, 삶이 시공을 넘어 다시 연결한다.
허물어지는 눈빛으로 동생은 말한다.
"아버지를 정말 미워하는데, 좀 좋아하는 것도 같고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좀 슬픈 것도 같습니다."
언어는 이미 시작된 오열을 쫓아가지 못한다. 삶은 이미 터져나왔다. 새롭게 펼쳐진 풍경 속으로 가득 밀려나간다. 13년 동안 열려져 있던 공백 속으로, 그 공간 속으로 깊숙히 메워 들어간다. 가득 외롭고 많이 서럽던 그 틈새틈새마다, 너무나 구질구질해서 너무도 구구절절했던 그 마음의 텅 빈 공간마다.
몰라도, 삶이 안다.
삶이 알아서, 우리도 이제 알게 된다.
어떤 풍경도 단절되어 소외된 채로, 삶이 결코 남겨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득 몰아쳐 더 강하게 연결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앞에 공백이 있어서, 우리가 놓인 그 바탕인 삶이 드러난다. 공백은 그 모든 것이 삶이었음을, 삶으로부터 소외된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음을 우리로 하여금 다시 기억하게 한다.
이제 만나진 새로운 풍경 속에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누구였는지는 선명하게 드러나고, 가슴을 흔들며 울린다.
그의 삶은 긍정되고 또 긍정되며, 그렇게 그를 다시 회복함으로써 우리의 삶도 다시 한 번 긍정되고 또 긍정된다. 해석학적 순환이다.
공백은 그를 다시 알린다. 그를 통해 펼쳐진 삶을 다시 알린다. 그래서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다. 공백은 삶이라고 하는 이 모든 구질구질한 잡동사니를 역설적으로 가장 신성하게 회복시키는 긍정의 방식이다.
잘 살았다.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잘 모르겠지만, 잘 살았다.
삶은 바로 그렇게 말한다.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형은 사람들 앞에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 버거운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고, 동생은 꿈이 좌절되어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그대로 자신의 인생이 보잘 것 없이 끝날 것 같아 두려워하며, 어머니는 아버지가 피우던 담배를 입에 물고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을 연기에 담아 내뿜는다.
전부 다 아버지가 살았던 바로 그 삶의 정확한 모습이다. 가족들은 이제 아버지의 삶이 자신들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아버지를 잃고 가족들이 경험한 13년간의 그 모든 구질구질한 역사는, 아버지에게도 동일하게 펼쳐졌던 바로 그 역사였을 것이며, 그렇게 그들은 같은 삶을 공유하고 있었다. 살아가며, 또 그리워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그러한 것처럼, 아버지 역시 그러했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은, 진실 중의 진실이었다.
그래서 모든 삶의 목소리는 언제나 이와 같다.
"그대를 잊은 적이 없다."
잊은 적이 없다는 것은, 잃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공백은 분절이 아니다. 공백은 오히려 우리가 결코 잃어질 수 없음을 알리는 가장 거룩한 증명이다.
영화에서는, 화장은 인간만의 고유한 장례법이라고 말한다. 화장은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가장 충만하게 온전했다는 것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다만 잘 살았다. 온전했다. 그도 우리도.
때문에 화장은, 죽은 그가 정말로 잘 살았음을 말해주는, 바로 그가 삶에서 결코 잊힐 수 없는 소중한 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곧,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사랑을 전하는 곱디 고운 방식이다.
극작가인 테라야마 슈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쓸모 없는 것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쓸모 없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없는 것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공백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그것이 공백이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 속에서 사랑을 다시 발견한다. 삶이라고 하는 구질구질한 잡동사니의 산이, 바로 이 사랑이 쌓아올린 보물산이었음을 다시 발견한다. 삶은 사랑이다.
그래서 공백을 산다는 것은, 없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없는 것을 향한 사랑을 우리는 영원이라고 부른다. 삶은 이 영원을 향해 흐른다. 영원히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