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크(2017)

실존주의, 돌아오지 않는 오디세우스의 미소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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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를 위한 노래들이 범람한다는 것은, 의존할 수 있는 거대한 대상에 대한 희구가 여전히 포기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직감하고 있다.


옛 기억을 좇아 우리 앞에 소환해낸 그 모든 대상들은 이제 더는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왕도, 대통령도, 국가도, 이념도, 부모도, 스승도 모두 무너져내린다. 오래된 거인의 석상들은 풍화된다. 빛이 바랜 사진으로만 남는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이 아니다. 실존주의가 결코 비극의 사조가 아닌 바로 그 이유다.


실존주의의 첫 발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깊은 계곡 광산 마을 동굴 집이 있었네
늙은 아빠 어여쁜 딸 사랑으로 살았네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귀여운 내 클레멘타인
너는 영영 가버리고 나만 홀로 남았네
이젠 다시 볼 수 없네 요정 같던 그 모습
네가 신던 작은 신발 내 마음이 아프다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귀여운 내 클레멘타인
너의 모습 늘 그리며 나만 슬피 남았네


그것은 고향의 상실이다. 사랑하던 것들과의 이별이다. 당연하게 우리 옆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되었던 그 모든 친교와의 분리다.


실존주의는 이 상실과 이별, 그리고 분리를 자신의 앞에 두는 것이다. 마주하는(encounter) 것이다.


암에 걸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앞두고 있는 일용직 아버지를 그녀의 앞에 두고 있는 한 16세 소녀의 이야기와 같다.


복지 대상에서도 제외되어, 도와줄 어떤 이도 없이 아버지와 판자촌의 쪽방에서 살고 있는 소녀에게 세상은 무심하다. 무심해서 신파는 개입되지 않는다. 얕은 희망의 눈물도, 약은 희망의 기쁨도, 이와 같이 실존주의는 모두 다 거세해버린다.


실존주의 안에 희망은 없다. 희망을 말하지 않는 철학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밖으로 희망을 찾으러 나가곤 한다.


소녀 또한 집 밖으로 나와 길로 나선다.


길의 끝에는 그녀가 되돌리고 싶은, 곧 돌아가고 싶은 희망의 이름, 엄마가 놓여 있다. 그렇게 그녀는 진정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현재의 집을 나선다. 귀향을 꿈꾸는 오디세우스의 여정이다.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칠고 험난한 모험들을 거치듯이, 그녀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그 여행의 끝에 비로소 당도하게 된 고향은 결코 낙원이 아니었듯이, 그녀에게도 또한 그러하다.


희망을 찾으러 떠났던 소녀는 여행의 끝에서 절망에 도착한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다.


다행스레 소녀는 전부 스러지기 전에 가까이 있던 동아줄을 붙잡는다. 붙잡고 보니 지푸라기였다. 그러나 그 지푸라기조차도 그녀에게는 행복하고, 또 감사하다.


그래서 그녀는 지푸라기를 놓고자 한다. 자신이 붙잡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지푸라기는 엉키고 꼬여 바스러질 것이며, 지푸라기의 고마움을 아는 소녀는 그러한 운명을 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가운데, 이제 지푸라기마저 놓고자 하는 그녀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완전한 항복이다.


그녀의 눈은 그저 떠 있고, 그녀의 귀는 그저 열려 있다. 그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할 일이 없다. 단지 보고 들을 뿐이다. 단지 정직하게 보고 들을 뿐이다. 그녀의 눈 앞에 있는 현실에 그렇게 정직해질 수 있을 뿐이다.


상실과 이별, 그리고 분리를 자신의 앞에 두고 마주하는 자는, 이처럼 정직하게 바라보는 자가 된다.


정직하게 바라본 결과, 히치하이크처럼 편승해서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보고자 했던 소녀는, 자신이 편승하려 한 그 모든 대상이 지푸라기였음을 알게 된다. 곧, 자신과 같이 상실과 이별, 그리고 분리를 앞에 두고 있는 동일한 존재들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바라보는 시선은 한층 더 선명하고, 또 상냥하다.


사랑하는 것들을 잃은 이의 옆에서 그 아픔을 자신의 눈동자로 깊이 담아내는 시선이다.


실존주의는 여기에서 도약한다.


이제 듣고 싶은 말만 가려 듣지 않고, 환하게 열린 그녀의 귀에 노래가락이 들려온다.


켄터키 옛 집에 햇빛 비치어
여름날 검둥이 시절
저 새는 긴 날을 노래 부를 때
옥수수는 벌써 익었다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
세상을 모르고 노나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잘 쉬어라 쉬어
울지 말고 쉬어
그리운 저 켄터키 옛 집 위하여
머나먼 집 노래를 부르네


마음은 노래에 담긴다. 그래서 노래는 마음에 담긴다.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가 있다. 이 노래를 통해 나를 부르고 있는 이가 있다.


내가 부르고 있던 것이 아니다. 나에게 들려오고 있던 것이다. 나를 부르는 노래가.


내가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노래에 담긴 마음을 향해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돌아오지 않는 오디세우스의 삶이 새롭게 쓰인다.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집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은 나아가야 할 곳이다. 머나먼 집은 현재와 끊어진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진 바로 이 현재에 있는 것이다.


집은 바로 이 연결성이다. 집이란 바로 연결하는 것이다. 상실한 모든 것을, 내 자신으로 말미암아 다시 연결짓는 것이다.


연결하고자 길 위에서 내딛는 모든 발걸음이 곧 집의 축조가 된다. 이 돌아오지 않는 오디세우스의 여정, 곧 실존주의의 여정은 이처럼 스스로가 집으로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집은 우리 자신의 안에도, 밖에도 없다. 우리 자신이 바로 집이다. 우리의 몸이 바로 집이다.


실존주의의 안에도, 밖에도 희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실존주의는 결코 안팎에서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그대 자신이 희망이다.


우리 자신이, 그토록 우리가 안팎으로 찾아 헤매던 바로 그 희망이다.


그리고 희망은 말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이다.


히치하이크의 의미는 여기에서 전복된다.


우리는 희망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보다 유능하고 괜찮아 보이는 것들에 편승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사랑했던 것을 상실한 까닭에, 우리만큼이나 안쓰럽고 서러워진 것들과, 그들 자신이 상실한 것들을, 우리로 하여금 다시 연결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길을 나섰던 것이다.


히치하이크는 길 위에서 헤매던 모든 소외된 것들이 우리를 마주한 기록이다.


모든 소외된 이들이, 소외를 다시 연결시켜주는 희망인 소녀를 마주한 기록이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완성이다.


실존주의는, 돌아오지 않는 오디세우스의 삶이 남기는 생생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풍화되지 않는다. 길 위의 오래된 발자국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작은 몸의 소녀가 다시 또 지금의 발자국을 포개고 있는 까닭이다.


그 자취는 영원하다.


끝나지 않는 길 위에, 영원한 집 한 채가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은 몸의 그대가 오늘도 길로 나선다. 홀로 서 있는 지푸라기들을 마주하러 나간다. 그렇게 사랑이 움직여가고, 돛은 힘차게 펄럭인다. 카뮈의 표현을 빌려, 우리는 행복한 오디세우스의 미소를 떠올려보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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