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2017)

다름과 만남, 동상이몽의 극복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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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언어와 같다고 말하는 현대정신분석의 통찰은 존중할 만하다.


언어는 무의식이라고 하는 꿈의 세계를 펼쳐내고, 동시에 그 경계를 한정짓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꿈은 렌즈와 같은 기능을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렌즈의 색조에 따라 현실은 그 형상을 달리 드러낸다. 결국 다채로운 렌즈의 수만큼 다양한 현실이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즐거운 꿈을 꾸는 이는 현실을 즐겁게 경험하게 되고, 무서운 꿈을 꾸는 이는 현실을 무섭게 경험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는 일종의 무한한 가상현실의 구조를 의미한다. 꿈은 그 자체로서 우리 각자에게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가상현실이며, 이 가상현실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언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 개인이 갖는 언어 습관이 그 개인의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통속적인 언술은 일견 타당하다. 이 언술을 조금 더 유려한 방식으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표현한 하이데거는 이와 같은 언어의 속성을 분명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언어는 개방하면서 동시에 제한한다. 경계의 문제다. 언어는 한 개인에게 하나의 가상현실을 펼쳐냄과 동시에, 그 가상현실을 다른 가상현실들과 변별되게 만든다.


곧, 언어로 인해 '다름'이 출현하는 것이다.


근대의 시기까지 이 다름의 문제는 틀림의 문제가 되어 왔다. 진리라는 이름의, 모두가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현실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화두였던 바, 언어 중에 더욱 진정한 옳음의 언어가 있다는 믿음은 공고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같음은 옳음처럼 행세해 왔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다름은 틀림이 되어 버렸다. 옳음의 이름 아래 모든 다름들은 존재해선 안될 죄인이 되어 버렸다. 이를 동일성의 폭력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소외를 낳은 대표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개인의 다름의 중요성을 목놓아 외친 실존철학의 절규와 함께 현대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이제 무수한 다름들은 저마다의 정당한 목소리를 강렬하게 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함께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열띤 논의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 영화도, 그러한 뜨거운 목소리의 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문명화와 함께 사라진 고대어를 아직도 전승하고 있는 두 노인을 찾아온 언어학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 다름과 만남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두 노인은 어릴 때부터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여자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원수처럼, 또는 죄인처럼 살아온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언어학자는 이 둘만이 전승하고 있는 고대어의 대화를 기록하는 작업을 통해, 고대어가 복원되듯이, 둘의 관계도 복구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언어의 회복이 존재의 회복을 이끈다는 이 관점은 다양한 심리치료의 방법론들의 핵심적인 공유점이기도 하다.


다름의 언어를 회복시키려는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다름의 언어가 어떻게 틀림의 언어로 바뀌었으며, 그로 인해 기존에는 온전했던 현실이 어떻게 잘못된 현실로 굴절되었는지, 그리고 두 노인 사이의 깊은 골짜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분명하게 언어에 대한 우상화의 문제가 놓여 있었다.


동일성의 폭력을 만들어낸 같음의 언어에 대한 강박도,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 그 반대편에서 펼쳐지는 고집스러운 다름의 언어에 대한 강박도 모두 다 이 언어에 대한 우상화가 야기하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우상화란 결국, 특정한 언어가 보다 더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즉, 언어의 중요성을 필요 이상으로 과대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가상현실의 촉매라고 말한 것처럼, 언어는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허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언어의 역설적인 속성이다.


보편의 언어라고 개별의 언어보다 더욱 진리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언어라고 다수의 언어보다 더욱 진리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보편의 언어와 개별의 언어, 다수의 언어와 소수의 언어는 똑같은 언어일 뿐이다. 즉, 가치적으로 등가인 가상현실일 뿐이다. 남반구의 텅빈 하늘과 북반구의 텅빈 하늘에 우열을 매길 수 없듯이, 동일하게 텅빈 허구일 뿐이다.


다름이 진실로 의미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 아름다움의 문제다. 그리고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가 허구를 필요로 하는 핵심적인 이유다. 꿈은 다만 아름다울 뿐이며, 다만 아름다운 그것으로 가장 온전한 것이다. 회색빛 우주에 칠해진 천연색의 선물이다. 인간이 창조한 가장 위대한 기적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꽃을 바라보는 인간이 있어 아름다움은 창조된다. 이와 같다.


우리는 저마다의 언어를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 저마다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상대에게 다가가 조우한다. 만남은 아름다움과 또 다른 아름다움이 마주보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의 개방이 허구로서의 언어의 본원적 기능이라고 할 때, 그 결과로 창발된 마주봄(encounter) 속에서는 어쩌면 소통을 위한 언어의 도구적 기능은 그 중요성이 희석될는지 모른다. 영화에서는 그렇게 묘사된다. 노인이 하는 말을 언어학자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노인의 아름다운 음성은 그대로 언어학자의 가슴에 전달되어, 그의 뺨에 눈물을 흐르게 한다.


전해진 것이다. 가장 고유하게 아름다운 하나가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아름다운 하나가, "당신도 아름다운 사람이에요."라며 다른 아름다운 하나에게 그를 아름다운 하나로서 바라보는 의도를 건넸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 분명히 새겨진 것이다.


여기에서 동상이몽은 극복된다. 동상이몽이 극복되는 방식은, 동상이몽이라는 현상 자체가 이미 가장 온전한 실재를 묘사하고 있다는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동상이몽은 소통의 결렬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다르면서 만날 수 있는, 또한 텅빈 하나의 존재상에 서로의 아름다움을 비추어 채색할 수 있는, 온전한 만남의 표현 방식이다.


이러한 만남의 감수성이 배태될 때, 언어는 거들 뿐이다. 다른 노인이 언어학자가 들은 말을 대신 해독해줄 때, 그 내용은 더욱 명료해진다. 그러나 이미 언어학자가 느끼고 있던 바다. 그래서 모든 언어화된 진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포섭될 때, 어쩐지 이미 알고 있던 것과 같은 기시감을 야기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만남을 향한 것이다. 언어는 만남을 향한 것이다. 언어가 창조해낸 우리의 고유한 아름다움은 만남을 향한 것이다.


우리는 만나고 싶어서 더욱더 허구가 되며, 더욱더 가상현실을 펼쳐낸다. 더욱더 개별적인 우리 자신이기를 꿈꾼다.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이 영화의 제목을 이제 이렇게 표현해볼 수 있다.


"나는 만나고 싶다."


언제라도 그리워하는 것을 만나고 싶어 길을 나서는 인간의 자취가 아른하다. 그 아름다운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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