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호텔(Hotel by the River, 2018)

모순에서 역설로 향하는 경계에서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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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흐르고, 호텔은 머문다.


그런데 강물의 시간도 얼어서 멈추고, 호텔의 공간도 열려서 흔들린다.


동사는 명사가 되고, 명사는 동사가 된다. 실체는 관계가 되고, 관계는 실체가 된다. 주객이 뒤집어지고, 자타가 옷을 바꿔 입는다.


두 아들의 아버지로 찾아진 이는 두 엄마의 자식으로 버려지고, 자식은 불안 속에서 어머니를 붙잡으며 다시 아빠를 찾아 나선다.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갈 때 우리는 동시에 한 걸음 한 걸음 죽어가는 것이며, 때문에 가장 뜨거운 삶이 가장 차가운 죽음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 용수 보살은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공(空)의 의미는 상호관계성이다.'라는 말조차도 공하다.


그래서 에로스는 삶만을 향해 흐르지 않고, 타나토스는 죽음만을 향해 흐르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한 침대에 누워 잔을 나누고, 둘은 이미 둘이 아니다. 둘이 드러내는 하나다. 하나가 드러나는 둘이다.


이 강변에서는, 이곳과 저곳을 가르는 이 경계에서는, 삶과 죽음이 뒤엉킨 이 사태 속에서는, 그렇게 모든 것이 고정적인 언어를 잃고 다만 부단히 피고 질 뿐이다. 고요하고 생생하다.


이를 우리는 역설이라고 부른다. 우리 삶의 근본적인 속성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함께할 수 없다고 간주되는 것들이 대치할 때 우리는 또한 이를 모순이라고 부른다. 모든 역설은 모순에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모순은 갈등이며, 갈등은 우리에게 긴장을 유발하고, 따라서 우리는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정답을 요구한다. 그 정답을 찾기 위해 애쓰고, 버티며, 피땀을 흘린다.


유치하나 늘 효과적인 예로, 우리는 짜장면과 짬뽕의 양자 선택의 상황 속에서 늘 운명적 결단을 요구받는다. 이는 단지 나의 섭식에 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선택으로 인해, 짜장면과 짬뽕이 행복하게 될, 또는 불행하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까지도 우리는 마치 책임을 요구받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고뇌하고, 또 고뇌한다.


어떠한 선택을 취해야 가장 좋은 것일지,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일지, 우리의 머리는 약을 빨고, 우리의 가슴은 악을 쳐댄다.


때로는 자위적 해법이 정답으로 취해지기도 한다.


"인생은 짧아. 책임감만으로 살 수는 없어. 자유롭게 니 인생을 살아."


그러나 이 발화의 주체 또한 실은 알고 있다. 이것이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늘 죄책감에 빠진다. 스스로를 격하게 변호하려 하고, 그 변호의 행위만큼 스스로에게 배신자의 못을 박는다.


이율배반적이며, 자기모순적이다. 그는 늘 흔들린다.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도 그 흔들림을 만들어내고 있는 장면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짜장면과 짬뽕은 여전히 그의 시선 앞에 놓여 있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꿈 속에서도 보인다. 죽어도 잊힐 수 없다.


그것은 경계에 선 시선이다. 그는 계속 경계에 서있다.


그는 강변이라는 경계에 서서, 흐르는 강을 머무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삶이라는 동사를 시선으로 포착해낸다. 시간이 공간화된다.


그리고는 끝내 이해한다.


자신이 필요했던 것은 모든 것의 위대한 정답이 아니라, 단 하나의 작은 고백이었다는 사실을.


"살아있는 동안, 다만 모두를 힘껏 사랑했다."


그가 선택할 수 없었던 이유는, 늘 선택의 경계에 그를 위치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래서 결국 그가 어떤 것도 결단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강변과 호텔을, 삶과 죽음을, 가해자와 피해자를, 채권자와 채무자를, 부모와 자식을, 얻은 자와 잃은 자를, 배신한 자와 배신당한 자를, 선택받은 것과 선택받지 못한 것을, 바로 그 모두를 전부 다 가득 사랑했던 까닭이다.


그 어떤 것도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제 역설에 도착했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완성되는 그 자리에서 꽃이 핀다. 완성을 기뻐하며 울음꽃이 핀다.


역설은 사랑이다.


역설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모순에서 임의적인 것을 정답으로 만드는 선택이 아니다. 이것과 저것을 다 사랑하고 있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역설이다. 곧, 사랑의 발견이 역설이다.


때문에 사랑은 이 대상에 속한 것도 아니고, 저 대상에 속한 것도 아니다. 대상들의 경계에 서서, 그 경계를 바라보고 있는 그윽한 시선의 주인, 바로 그에게만 속한 것이다. 때문에, 대상화되지 않은, 아니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대상화될 수 없다는 것은 무조건적이라는 것이다. 아가페는 현현한다.


아가페의 호혜는 아가페의 통로가 된 그 자신에게 가장 먼저 임한다. 은총은 여기에 있다.


사랑을 발견한 자여, 가장 많이 사랑받으시기를. 아픔 속에서도, 아픔보다 더 크게 아픔을 포함하는 원을 그리고 있는 사랑 속에서 더는 아프지 않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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