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64

"영성의 다양성"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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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다양성'이라는 표현은 실은 동어반복이다.


'영성' 안에는 처음부터 '다양성'의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영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실제적으로 얻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면 이는 분명하다.


우.리.는. 영.성.으.로. 자.유.를. 말.하.고. 싶.어.한.다.


자유는 삶의 속성이다. 그러니 영성은 삶으로부터 분리된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삶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소재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자유도 다른 누군가의 자유가 아니라, 바로 나의 자유다.


만약 우리가 다른 이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고 한다면 이는 정말로 자유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외적 구조의 변화일 뿐이다. 그러나 자유는 내적 실재의 변혁이다.


이를 더 쉽게 말하자면, 누구도 다른 이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오.직. 스.스.로. 자.유.롭.고.자. 할. 때.만. 자.유.로.워.진.다.


삶만큼이나 삶의 본래적 속성인 자유 또한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곧, 자유는 나와만 관련되는 것이며, '자유롭다'는 것은 결국 '나답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자유롭다고 경험할 때를 떠올려보자. 내가 내 자신으로 얼마든지 살아도 좋다고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경험한다. 가.장. 나.다.울. 때.가. 가.장. 자.유.로.울. 때.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다양성의 의미다.


다양성은 많고 많은 것들 중에 그것이 그것이듯 나도 나다워도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신으로 드러나 있는 그 속성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누군가가 타인을 자유롭게 만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그의 '나다움'은 오직 그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며, 외적으로 규정되거나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개인이 나답게 살고자 선택하고 나를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나.일. 자.유.를. 실.현.하.는. 삶.이.다.


다시 말하면, 자.유.로.운. 나.로. 사.는. 삶.이.다.


그래서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체험은 그 체험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삶으로 드러난 결과에 의해서만 그 가치가 평가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누군가가 영적인지를 우리가 묻고 있다면,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은 그가 현재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이다.물론 여기에서 자유로운 삶이란 그 주체가 생각대로 다 이루는 현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에.게. 주.어.진. 지.금.의. 조.건.으.로.도. 그.는. 나.인.가.이.다.


즉, 그가 현재 사막에 있다면 사막의 조건을 통해서 그는 '나다움'을 드러내고 있는가만이 평가되는 유일한 요소다.


사막에 있는 이가 사막을 '나다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동시에 '사막다움'일 것이다.


이처럼 전술했듯이 '나다움'은 '자유로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정한다.


'나다움'은 '사막다움'이고 '강물다움'이며 '초원다움'이고 '계곡다움'일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나의 삶으로 긍정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조화로움'의 실재를 발견한다.


영.성.은. 조.화.로.움.이.다.


다양성이 다양성의 의미로 드러날 때는 그것들이 조화로울 때다.


'조화'라는 말의 멋진 점은 언제나 '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외부의 조율자가 아니다. 나까지 포함해서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분리될 수 없다.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이. 모.든. 다.양.성.에. 참.여.하.고. 있.다.


이 실감이 조화로움의 감각이다.


그러니 영성은 저위의 세계에 대한 고위의 나의 투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답다'는 것은 '세계답다'는 것이며, 그 일치성이 삶이다. 삶은 일치되는 방향을 향해 계속 흐르며 우리를 떠밀어간다.


파도에 맞서 나를 주장하며 파도와 싸우고 있는 이가 자유로운가? 아니면 파도와 일치해서 파도를 타고 있는 이가 자유로운가?


오늘날 다양성은 전자의 함의를 담은 투쟁의 표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나다움'을 '나에 대한 고집'으로 오해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고집은 언제나 결핍에 대해 발현되는 것이다. 가장 나를 상실했을 때 우리는 나를 고집한다. 갈등의 불길로 연금한 나를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변증법은 영성의 원리가 아니며, 연금술의 단지는 영성의 그릇이 아니다.


영성의 다양성은 여러 상대들과 대립해가며 그 고유한 빛을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립의 결과로 통합되어 빛을 상실하게 된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 통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는 투쟁이 필요하지도 않다.


삶.은. 철.저.한. 절.대.주.관.의. 영.역.인. 까.닭.이.다.


삶이 빛나는 것은 내가 아니면 누구도 대신 살 수 없다는 이 대체불가능함의 이유다.


이 한 번뿐인 삶을 잘 살고 싶다, 바로 그 소망이 영성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이 하나뿐인 나로서 나답게 살고 싶다며, 우리는 드높이 자유를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서있는 어디에서라도 그 음색이 조화롭고 깊어 매일같이 듣고 싶은 노래를.


영성은 매일매일 자유의 노래가 되어가는 삶의 특성이다.


노래하는 이는 스스로의 노래에 끌려 노래한다. 그리고는 그 노래가 된다.


어떻게든 반드시 자유롭고자, 우리가 본래 자유롭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우리는 이처럼 자유에 끌리며 동시에 자유를 끌어온다.


내가 나다울 그 자유에 매혹되는 나의 나다운 이 성질이 곧 영성인 것이다.


이것은 동어반복이지만, 좋은 것은 다시 말해지고 자꾸 말해져도 좋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살고 자꾸 사는 것이다. 나일 자유를 향해 자유롭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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